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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전래와 공인: 삼국의 사상적 기반 형성

이차돈 순교비
이차돈 순교비

1. 서론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동아시아로 전파된 외래 종교로, 삼국 시대의 사상적·문화적 기반이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불교는 공인되었고, 이는 각 왕조의 정치적 안정과 왕권 강화를 위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각 나라의 불교 공인 과정에는 시간적 차이와 특유의 갈등이 존재했다.

 

2. 4세기 후반의 불교 전래와 고구려·백제의 공인

2.1 고구려의 불교 공인 (372년)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공인했다.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前秦)의 부견(符堅) 황제가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며 불상과 경문을 전달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374년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도착했고, 왕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그들을 머물게 하였다.

이 시기 이전에도 고구려와 중국의 고승 간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존재한다. 동진(東晋)의 고승 지둔도림(支遁道林)이 고구려 도인에게 보낸 편지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를 통해 372년의 불교 공인 이전부터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구려는 393년(광개토왕 2년)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세우며 불교를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2.2 백제의 불교 공인 (384년)

백제는 384년(침류왕 1년)에 동진(東晉)에서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陁)가 도착하며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으로 초대해 경배를 올리고, 이듬해 한산(漢山)에 사찰을 세워 열 명의 승려를 배출했다.

국보 백제 금동대향로 (百濟 金銅大香爐)
국보 백제 금동대향로 (百濟 金銅大香爐)

그러나 백제 역시 불교 공인 이전부터 동진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불교에 대한 접촉이 있었다. 372년과 373년, 397년에는 백제 사신들이 동진에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백제가 동진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 사상을 사전에 수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불교 공인 후 백제는 국가 운영에 불교를 적극 활용하였으며, 527년에는 대통사(大通寺)와 같은 대규모 사찰이 창건되기도 했다.

 

3. 신라의 불교 공인: 이차돈의 희생과 갈등

3.1 신라 불교의 전래와 초기 확산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불교 공인 시점이 늦어졌지만, 그 전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있었다. 눌지왕(417∼458) 시기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것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묵호자는 일선군 모례의 집에 머물며 신라 귀족들과 교류했으며, 왕녀의 병을 향을 피워 치료해주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미추왕 2년(263)에도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신라에 와서 불교를 전하려 했지만, 당시 신라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에 거부감을 보였다. 아도는 신라 왕녀의 병을 치료한 후에야 사찰 창건을 요청할 수 있었고, 이후 소지왕(479~500) 시기에도 아도와 관련된 불교 활동이 이어졌다.

3.2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 (527년)

신라에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공인된 것은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법흥왕은 사찰을 세워 불교를 확산하고자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이차돈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겠다고 자청했고, 그의 처형 시 하얀 피가 솟구치는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불교의 신성함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귀족들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차돈의 순교
이차돈의 순교

법흥왕은 이후 흥륜사(興輪寺) 창건을 추진하였고, 이는 544년(진흥왕 5년)에 완성되었다. 불교 공인 후 신라는 살생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말년에는 왕비와 함께 출가하는 등 불교적 가치에 기반한 정책을 펼쳤다.

 

경주 흥륜사지 (慶州 興輪寺址)
경주 흥륜사지(慶州 興輪寺址)

 

4. 삼국의 불교 공인과 왕권 강화

4.1 불교와 왕권 강화

삼국 모두 불교를 공인한 배경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불교는 기존의 무교(巫敎) 신앙과 달리 중앙집권적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으며, 왕실은 이를 통해 권력을 집중시켰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불교를 통해 국가적 통합을 도모했고, 백제는 성왕 시기 불교치국책을 통해 정치·문화적 발전을 꾀했다. 신라의 경우 법흥왕이 불교를 활용해 귀족 세력을 제압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4.2 백제 불교의 신라 영향

신라는 초기 불교 수용 과정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나, 법흥왕 시기 이후에는 백제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백제는 양(梁)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기술을 도입했으며, 이러한 경험이 신라에 전해지면서 흥륜사와 같은 대규모 사찰 창건에 영향을 미쳤다.

 

5. 결론

불교는 삼국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며 정치적 안정과 왕권 강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불교를 공인했지만,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비로소 공인이 이루어졌다. 각 나라의 불교 수용 과정은 서로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으며, 삼국의 문화와 정치체제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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