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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黑齒常之): 백제 부흥군의 장수에서 당의 무장으로

흑치상지(黑齒常之)
흑치상지(黑齒常之)

개요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 말기 귀족 출신으로, 백제의 멸망 이후 부흥운동을 주도한 장수였다. 그는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가 다시 도망쳐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결국 당나라에 귀순해 부흥운동 종식을 주도했다. 이후 당의 무장으로 활약하며 여러 전쟁에서 공을 세웠지만, 결국 무고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흑치 가문의 성립과 흑치상지의 성장

흑치상지의 성은 '흑치', 이름은 '상지', 자(字)는 '항원(恒元)'이었다. 그는 630년 백제 무왕(武王) 시기에 태어났으며, 아버지 사차(沙次)와 조부 덕현(德顯), 증조부 문대(文大) 모두 백제의 고위 귀족이자 달솔(達率)을 역임한 명문 가문이었다.

흑치상지 가문이 왕족이었던 부여씨(扶餘氏)에서 비롯되었고, '흑치'라는 성은 그가 태어난 지역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그가 당나라에서 활약한 후 변방을 상징하는 의미로 새로운 성을 취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흑치 가문의 성립 과정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병법, 음양오행에 능통했던 흑치상지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달솔의 지위에 올랐고, 이후 풍달군장(風達郡將)으로 임명되며 군사 및 민정에 관여했다.

 

 

백제 부흥운동에서의 활약

백제 멸망과 초기 부흥운동

660년(의자왕 20)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흑치상지는 나당연합군에 항복했으나, 연합군의 약탈과 폭정에 반발해 탈출했다. 그는 임존산(任存山)을 거점으로 부흥군을 조직했고, 열흘 만에 약 3만 명의 군세를 모았다.

당군은 소정방을 파견해 임존성을 공격했으나, 흑치상지의 부흥군은 이를 격퇴하며 200여 개 성을 탈환했다. 하지만 복신과 도침의 내부 갈등, 그리고 부흥군 지도층의 분열로 인해 세력은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나당연합군은 웅진성을 탈환하며 상황을 역전시켰다.

부흥운동의 종식과 당나라 귀순

663년, 나당연합군은 주류성(周留城)을 함락시킨 후 임존성으로 진격했지만, 흑치상지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결국 흑치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沙咤相如)와 함께 당나라에 항복했다. 그 후 그는 당의 군사를 받아 임존성을 공격해 함락시키며 부흥운동을 종결시켰다.

이후 흑치상지는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갔고, 장안에 정착했다. 그가 당에 귀순한 후 절충도위(折衝都尉)로 임명되었으며, 웅진도독부의 군장을 맡았다.

 

당나라에서의 활약과 업적

당나라에서의 군사 활동

흑치상지는 웅진도독부가 폐지된 후 당나라로 돌아가 중앙군에서 활약했다. 그는 좌령군위(左領軍衛)의 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양군(浮陽郡)의 개국공(開國公)으로 봉해졌다. 당나라에서 그는 토번(吐蕃)과 돌궐(突厥)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678년 토번군의 침입 당시, 흑치상지는 결사대를 이끌고 적군을 습격해 승리로 이끌었다. 684년에는 측천무후의 전횡에 반발한 서경업의 반란 진압에도 참여해 공을 세웠다.

비극적인 최후와 사후 평가

흑치상지의 몰락은 687년 돌궐과의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돌궐 추격 작전 중 동료 장수의 패배와 연루되면서 그의 공적은 무효화되었다. 이후 689년, 그는 반란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자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죽음은 측천무후의 공포정치와 혹리 주흥(周興)의 무고로 인한 비극으로 여겨진다.

사후 복권과 평가

흑치상지의 억울한 죽음은 그의 아들 흑치준(黑齒俊)에 의해 698년 신원되었다. 측천무후는 흑치상지를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으로 추증하고, 그의 묘를 개장해 낙양 북망산(北邙山)으로 이장하도록 했다.

현재 흑치상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배신한 인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당나라에서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남긴 성공한 이민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생애를 실패한 부흥군 지도자이자 비운의 인물로 해석하기도 한다.

 

결론

흑치상지의 생애는 백제 멸망과 부흥운동, 그리고 당나라에서의 활약과 비극적 최후까지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생존을 위해 선택을 거듭한 인물이었으며, 그 선택의 결과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게 했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몰락 후에도 새로운 길을 찾아 활약했지만, 결국 정치적 음모에 희생된 비운의 무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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