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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 신라비: 비운의 석비가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

울진 봉평 신라비(蔚珍 鳳坪 新羅碑)
울진 봉평 신라비(蔚珍 鳳坪 新羅碑)

개요

울진 봉평 신라비(蔚珍 鳳坪 新羅碑)는 신라 시대의 중요한 금석문(金石文) 중 하나로,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신라 법흥왕 11년(524년)에 세워졌으며, 당시 사건의 해결과 사회 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한 목적에서 건립되었다. 비석의 내용은 신라 육부 체제와 지방 통치 구조, 성문법 시행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여 신라사 연구에 핵심 자료로 평가된다.

 

발견 과정과 현재의 위치

울진 봉평 신라비는 우연한 계기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8년 1월, 논 주인이 농사에 방해가 되는 돌을 굴착기로 옮겨 개울가에 버리면서 일부 글자가 드러났다. 이후 마을 이장이 이 사실을 발견해 신고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초기 보도에서는 비문의 판독에 오류가 많았으나,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거치며 그 내용이 명확해졌다.

이후 해당 비석은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석의 형태와 서체

비석은 사각형의 자연석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한 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다. 비문은 총 10행에 걸쳐 약 400자의 한자로 이루어져 있다. 서체는 중국 북조풍의 해서(楷書)로 쓰였지만, 예서(隷書)의 특징이 일부 남아 있다. 다만, 비문은 마모된 부분이 많아 읽기 어려운 글자도 있다.

건립 배경과 시기

비문에 언급된 "갑진년 정월 십오일(甲辰年正月十五日)"이라는 구절을 통해, 비석의 건립 연대가 법흥왕 11년(524년)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동해안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지방 통치를 강화하던 시기였다. 비문에 기록된 사건은 신라 지배층이 모여 논의하고 집행한 중대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이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명확하지 않지만, 영토 확장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과 그 해결을 목적으로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의 내용과 사회적 의미

비문은 당시 신라의 법령과 지방 통치 구조를 잘 보여준다. 법흥왕과 그의 동생이 주도한 회의에서 결정된 처벌과 법령 집행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비문에서는 '장육십(杖六十)'과 같은 구체적인 형벌과 더불어, 교법과 별교령 등 법적 용어도 확인된다. 이를 통해 법흥왕 재위 시절에 신라의 율령이 이미 시행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문에 등장하는 여러 지역 집단과 신분 체계는 당시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신라 육부 체제와 왕경(王京)의 운영 방식, 외위와 경위로 나뉜 신분 체계 등이 상세히 드러나 있다.

신라 육부와 왕권의 한계

울진 봉평 신라비는 신라 육부 체제에 대한 이해를 크게 진전시켰다. 비문에 명시된 왕과 관료들이 육부에 소속되어 정책을 논의하고 집행하는 과정은 당시 신라의 왕권이 절대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국왕도 하나의 부에 소속된 상태에서 다른 관료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의사 결정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 초기의 정치 체제가 강력한 중앙집권이 아닌, 여러 부의 협력과 조율로 운영되었음을 시사한다.

신라 율령과 지방 통치 체제

울진 봉평 신라비는 신라 율령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비문에 언급된 법령과 형벌은 법흥왕 7년(520년)에 반포된 율령의 실제 적용 사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비문에 나타난 지방 관리의 파견과 지방민의 신분 체계는 신라가 모든 촌락에 중앙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일부 촌에만 도사를 파견하며 통치한 방식을 보여준다.

 

울진 봉평 신라비의 학문적 의의와 가치

울진 봉평 신라비는 신라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비록 포항 냉수리 신라비(501년)의 발견으로 최고(最古)의 비석이라는 타이틀은 빼앗겼지만, 그 역사적 가치는 여전히 크다. 울진 봉평 신라비는 신라의 정치·사회·경제 제도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핵심 자료로, 한국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결론

울진 봉평 신라비는 신라의 법과 제도, 지방 통치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그 발견은 신라사 연구에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 비석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당시 신라 사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학문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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