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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寶藏王)
보장왕(寶藏王)

1. 개요

고구려의 제28대 왕인 보장왕(寶藏王, ?~668)은 642년부터 668년까지 재위하며 고구려 역사에서 마지막 왕으로 기억된다. 그의 즉위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연개소문이 장악했다. 보장왕은 고구려 멸망의 시기에 왕으로 남아 있었으나, 그의 통치 아래 고구려는 당(唐)과 신라와의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668년 9월 고구려는 멸망하고 보장왕은 당에 포로로 잡혀 가게 된다.

 

2. 가계와 가족관계

보장왕의 본명은 고보장(高寶藏)이며, 그의 아버지는 제25대 평원왕(平原王)인 대양왕(大陽王)으로 알려져 있다. 보장왕은 왕비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아들로는 고임무(高任武), 고복남(高福男), 고덕남(高德男), 고덕무(高德武), 고련(高連) 등이 있다. 이들은 보장왕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특히 고임무는 647년에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은 나중에 신라에 의해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책봉된다.

 

3.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은 영류왕(榮留王)의 동생인 대양왕의 아들로, 원래 왕위 계승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보장왕이 왕으로 세워졌다. 보장왕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한 왕으로, 국정의 주도권은 귀족들과 연개소문에게 있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당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여러 전투에서 저항했으나 결국 고구려의 국력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보장왕 즉위 후 신라의 김춘추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 원조를 요청했으나, 보장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그의 개인적인 판단이라기보다 연개소문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643년에는 도교를 도입하고 진흥하려 했으나, 이것 또한 연개소문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당은 645년에 태종이 직접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이후 장기적인 소모전으로 전환하면서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이 시기 보장왕은 왕으로서의 권한이 제한된 채, 귀족들의 지도 아래 대외 항전에 참여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침략을 오랫동안 저지했지만, 백제의 멸망 이후 주변에 지원 세력이 없어 고립되었고, 신라가 당과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들인 연남생(淵男生)과 연남산(淵男産) 간의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고, 결국 연남생이 고구려를 배반하고 당에 망명함으로써 고구려의 멸망이 가속화되었다. 668년, 고구려는 멸망하게 되고, 보장왕은 적장 이적(李勣)에게 포로로 잡혀 당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갔다.

 

4.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노렸으나

고구려의 멸망 후, 보장왕은 당 고종의 사면을 받았다. 이는 그가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의 문제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인정을 의미했다. 이후 그는 조선왕(朝鮮王)으로 봉해지고 요동도독(遼東都督)으로 임명된다. 이는 당이 고구려 영토의 안정화를 위해 보장왕을 이용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보장왕은 요동으로 돌아온 후,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고 말갈(靺鞨)과 연계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시도하였으나, 계획이 발각되어 681년 공주로 유배당하였다. 유배 후 보장왕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682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 이후, 당은 그를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고 장안에 장사지냈다.

 

5. 결론

보장왕은 실권이 없는 왕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고구려 부흥을 위한 노력은 그가 무능한 왕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통치 아래 고구려는 고난의 시기를 겪었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민족과 국가의 재건을 위해 애썼던 인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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