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필의 생애와 배경
서필(徐弼, 901~965)은 고려의 초기 혼란과 개혁 속에서 활약한 충신이자 재상입니다. 효공왕 5년에 태어나 광종 16년에 생을 마감한 그는 훗날 광종의 묘정에 배향될 정도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서필은 집안 대대로 이천 출신으로, 그의 손자인 서눌(徐訥)도 서필의 충성과 강직함을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이천 출신 청년, 난세에 관직에 나아가다
서필의 고향은 현재 경기도 이천이며, 그의 집안은 이천 서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서신일(神逸)은 설화에 따르면 신인(神人)의 축복을 받아 자손들이 고관대작에 오를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필은 태조 시기 도필(刀筆)로 출사하였는데, 이는 학문이나 무예가 아닌 일반 행정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서필은 특히 태조, 혜종, 정종 시대를 거치며 관직 경험을 쌓아갔고, 광종대에 이르러 재상에 올랐습니다. 그의 정치적 활약은 태조공신이라는 후대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그가 고려 초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줍니다.
3. 검소한 재상, 조정의 질서를 논하다
서필의 검소함과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남아 있습니다. 광종은 한 번은 서필과 다른 재상들에게 황금 술잔 세트를 하사했으나, 서필은 이를 정중히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이 금그릇을 사용하면, 임금께서는 장차 무엇을 쓰시겠나이까?”
이 발언은 광종이 추진했던 공복 제정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관료들이 위계에 따라 공복(公服)을 입는 것이 강조되었으며, 이는 서필의 검소한 태도가 단순한 미덕 이상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왕과 신하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조정의 질서를 중시했습니다.
4. 정치 개혁, 원칙을 내세우다
서필은 광종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광종에게 “공이 없는 자들에게 상을 주지 말고, 공이 있는 자들을 잊지 마십시오”라며 직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에 광종이 어떤 사람을 지칭한 것인지 묻자 서필은 측근들을 가리키며 "공이 없는 자는 바로 너희들이니, 그대로 전해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광종의 측근 정치에 대한 강한 경고였습니다.
또한, 서필은 광종의 투화 중국인 우대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서필은 "투화인들이 원하는 집과 관직을 차지한다면, 내 집을 먼저 바치는 것이 자손을 위한 길일 것 같다"고 비꼬아 말하며 광종의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이 사건은 서필이 단순히 반대 세력이 아닌 원칙과 정의를 기준으로 국정을 평가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5. 인자한 정치를 권하다
서필의 마지막 일화는 인자한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어느 날 왕실의 마구간에서 말이 죽는 일이 발생하자, 광종은 책임자에게 벌을 내리려 했습니다. 이때 서필은 공자의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不問馬)'는 고사를 인용하며 사형을 면하게 했습니다. 이는 서필이 광종에게 단순한 법 집행보다 인자함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권장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일화는 단순히 한 관리의 목숨을 구하는 차원을 넘어, 당시 잦았던 정치적 숙청과 처벌에 대한 서필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는 광종이 지나친 숙청을 멈추고 인자한 정치를 펼치길 바랐습니다.
6. 강직한 가풍, 후세에 전해지다
서필은 세 아들 서렴(徐廉), 서희(徐熙), 서영(徐英)을 두었습니다. 특히 서희는 성종대에 거란의 침입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고 강동 6주를 축성하는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서희 역시 아버지 서필처럼 강직한 충성을 바탕으로 왕에게 직언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손자 서눌 또한 법과 원칙을 중시하는 정치적 신념을 계승했습니다. 이처럼 서필이 지녔던 강직한 충신의 면모는 그의 가풍으로 이어지며 고려 조정에 하나의 맑은 흐름을 남겼습니다.
결론
서필은 검소함과 강직함으로 고려 초기의 혼란을 헤쳐 나가며 광종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는 개혁적인 정책과 정의로운 국정 운영을 위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인자한 정치를 통해 백성의 안녕을 도모했습니다. 그의 정신은 후손들에게도 이어져 고려 조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필의 삶과 가풍은 오늘날에도 원칙과 정의를 추구하는 리더십의 본보기로 평가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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