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아프라시압 궁전벽화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인근의 아프라시압 언덕 궁전 터에서 발견된 고대 벽화입니다. 이 벽화는 특히 두 인물이 새 깃털을 꽂은 모자를 착용한 모습으로 주목받는데, 이들이 고구려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벽화에 등장하는 '바르후만'이라는 왕은 중국의 당나라 기록에 등장하는 '불호만(拂呼縵)'과 동일인물로 보이며, 벽화는 7세기 중엽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고구려 사절단의 모습이 사마르칸트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가 중앙아시아까지 외교적 교류를 확장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벽화는 고구려의 넓은 국제 외교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벽화의 발견과 연대
아프라시압 궁전벽화는 1965년 러시아(당시 소련) 연구진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었고, 1975년 발굴보고서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벽화의 오른쪽 하단에 보이는 두 명의 인물이 고구려인의 복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받았습니다. 당시 고구려 복장에 대한 기록이 중국 사서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벽화는 연구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벽화의 명문에 따르면, 벽화는 바르후만 왕이 재위하던 시절을 묘사합니다. 바르후만 왕은 당나라 역사서에도 등장하는데, 당나라는 650~655년 사이에 그를 강거도독(康居都督)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 사절단이 사마르칸트에 방문한 시기를 650년에서 658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마르칸트는 당시 당과 서돌궐의 세력 다툼 속에서 민감한 지역이었습니다. 서돌궐 지도자인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가 당에 반기를 들고 657년에 패배하기 전까지는 강국과 당의 관계가 쉽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658년 당은 기미주(羈縻州)를 설치하며 중앙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고구려 사절단의 파견 시기는 658년 이전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고구려 사절단의 이동 경로
고구려 사절단이 사마르칸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중원을 거치지 않고 초원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구려는 이미 5~6세기부터 돌궐 등 초원 유목국가와 교류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세 가지 이동 경로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실위(室韋) 경로:
실위는 현재의 중국 흑룡강성 눈강 유역에 위치한 여러 부족 집단을 가리킵니다. 고구려는 이 지역과 철 교류를 통해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평양에서 출발한 사절단이 송화강을 따라 실위를 지나 몽골 초원을 거쳐 오르콘강 유역에 도달하는 경로입니다. - 말갈(靺鞨) 경로:
말갈 지역은 7개의 부로 나뉘어 있었고, 고구려와 돌궐의 영향을 받은 속말말갈(粟末靺鞨)이 그중 하나였습니다. 고구려는 말갈 지역을 지나 몽골 초원으로 진입해 오르콘강 유역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 거란(契丹) 경로:
거란 지역은 시라무렌 강 유역에 위치했으며, 고구려와 거란은 4세기 후반부터 교류와 충돌을 반복했습니다. 이 경로를 통해 고구려 사절단은 내몽고와 오르콘강 유역을 지나 알타이 산맥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오르콘강 유역에 도착한 고구려 사절단은 소그드인의 안내를 받아 알타이 산맥을 넘고 이식쿨 호수와 시르다리야 강을 거쳐 사마르칸트에 도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사절단 파견의 배경
645년 당 태종의 침략을 막아낸 고구려는 이후 당과의 소모전 속에서 국력의 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당의 지배에 저항하는 세력과의 연계를 모색하며 외교적 돌파구를 찾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고구려는 말갈을 통해 철륵 세력과 연계를 시도했으며, 비슷한 맥락에서 사마르칸트에도 사절단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절단 파견 시기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이 제기됩니다.
- 650~657년 무렵:
649년 당 태종의 사망 이후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시기 서돌궐의 아사나하로가 당에 반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서돌궐과의 협력을 위해 사마르칸트에 사절단을 파견했을 수 있습니다. - 663년 무렵:
661년 당이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철륵의 반란으로 인해 철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철륵과의 연계를 시도하며, 추가적으로 사마르칸트와의 외교를 도모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결론
아프라시압 궁전벽화는 고구려의 국제 외교 활동이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고구려는 초원길을 통한 유목 세력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까지 외교 네트워크를 넓혔으며, 이를 통해 당의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자 했습니다.
이 벽화는 고구려가 단순한 동아시아 국가를 넘어 광범위한 외교 관계를 맺었던 사실을 증명합니다. 고구려의 지정학적 위치와 교통로에 대한 높은 이해는 그들의 국제적 활동을 가능하게 했으며, 아프라시압 벽화는 그 역사적 산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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