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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신라 왕궁, 경주 월성

천 년의 신라 왕궁, 경주 월성
경주 월성

101년(파사왕 22)에 시작된 신라 왕궁의 중심

경주 월성 개요

경주 월성(月城)은 천 년의 신라 역사를 지탱한 왕궁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고문서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1년 파사왕 때 축조되어 왕이 거주하는 성으로 사용되었으며, 재성(在城)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신월성, 만월성, 반월성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렸고, 신라의 정치·문화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석빙고(보물 제66호)
석빙고(보물 제66호)

월성의 동쪽에는 월지(月池)와 동궁(東宮), 북쪽으로는 첨성대와 대릉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의 서쪽으로는 남산과 연결된 월정교(月淨橋)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일정교(日淨橋)가 위치해 있습니다. 1979년부터 지속적인 발굴조사로 청동기부터 통일신라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고, 조선시대에 축조된 석빙고(보물 제66호)가 월성 안에 남아있습니다.

 

성벽과 도랑 속 신라 왕궁의 비밀

월성의 성벽 축조와 발굴 조사는 일제강점기(1915년)에 시작되었으며, 2007년에는 지하 레이다 탐사를 통해 성 내부의 건축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서성벽, 동문지, 해자 등이 발굴되면서 신라의 건축 기술과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 성벽 축조 기술

월성의 성벽은 여러 층의 흙과 자연석을 교차로 쌓아 올린 부엽공법(敷葉工法)이 사용되었습니다. 식물의 잎과 줄기를 바닥에 깔아 지반을 단단히 하고, 방수 및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조개껍질과 석회를 층층이 깔았습니다. 성벽은 흙과 돌을 조화롭게 활용한 3단계 공법으로 쌓았으며, 점토층을 이용해 안정적으로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월성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수백 년간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2. 희생의 제물, 인신제의(人身祭儀)

서쪽 성벽 바닥층에서 두 구의 인골과 네 점의 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은 성벽 축조가 무사히 진행되길 기원하며 땅의 신에게 바쳐진 희생자로 추정됩니다. 인골에는 외상 흔적이 없고, 나무껍질로 덮인 상태였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통일신라 우물경주 황남동의 건물 초석에서도 인골과 동물 뼈가 발견된 바 있습니다.

 

월성의 도랑(해자)과 왕궁 내부

월성의 해자는 성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외부 침입 방지, 물자 운반, 식수 확보 및 조경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해자는 남천(南川)을 이용해 물길을 연결하고, 일부 구간은 돌을 사용한 석축 해자로 조성되었습니다.

  • 석축 해자: 최대 길이 150m, 폭 50m, 높이 0.8m
  • 수혈 해자: 폭 58m, 깊이 1.8m

해자 바닥은 진흙층으로 덮여 있었고, 가시연꽃의 흔적이 남아 있어 물이 깊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쉽게 건널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 왕궁 내부의 건물지

발굴조사를 통해 월성 내부에는 약 17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건물들은 관청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며, 건물지 아래에서 지진구황칠과 같은 제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중앙 건물지에서 출토된 벼루 조각은 신라의 문자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월성의 생활과 유물

1. 목간(木簡)과 문서 유물

월성에서 발견된 목간에는 행정 보고, 세금 수납, 노동 동원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2016 - 2017년에 출토된 목간 중 ‘병오년(丙午年)’이라는 연호가 명확히 새겨진 목간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526년(법흥왕 13년) 혹은 586년(진평왕 8년)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통해 당시 신라가 지방민을 동원한 대규모 공사를 진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기와와 토기에는 신라의 관직명, 궁궐 관련 명칭이 새겨져 있어 당시 행정 체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라는 연호가 새겨진 기와는 679년(문무왕 19년) 월성 수리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입니다.

 

월성의 동식물과 경관 복원

월성 해자에서 발굴된 동식물 유물을 통해 신라 시대의 생태 환경과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습니다.

1. 동물 뼈와 농경 생활

월성에서 발견된 동물 뼈는 소, 말, 개, 멧돼지, 곰 등 다양한 종류입니다. 멧돼지와 곰의 뼈는 제의에 사용된 흔적이 있으며, 말과 소의 어깨뼈에 뚫린 구멍도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신라 사람들이 동물을 노동력의례에 활용했음을 보여줍니다.

2. 식물 유물과 제의

곡물류로는 벼, 밀, 콩이, 과실류로는 복숭아와 자두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복숭아씨는 불로장생과 벽사의 상징으로, 제의에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해자에서 발견된 약 2만여 점의 가시연꽃 씨앗은 월성의 여름 풍경을 상상하게 합니다.

 

신라 왕궁의 문화와 교류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토우토용은 당시 신라인들의 생활과 외부 교류를 보여줍니다. 특히, 터번을 쓴 소그드인을 형상화한 토우는 신라가 중앙아시아와 교류했음을 시사합니다. 이 외에도 말, 염소, 돼지 등 다양한 동물을 묘사한 토우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주 월성의 역사적 가치

월성은 단순한 왕궁을 넘어 신라의 정치·사회·문화적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성벽 축조에 담긴 고급 기술과 해자의 복합 기능, 목간과 유물에 남겨진 신라 사람들의 흔적은 월성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오늘날 월성은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그 위상을 되찾고 있으며, 신라 천 년의 역사를 품은 유적지로 남아있습니다. 경주를 방문한 이들에게 월성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경주 월성은 천 년의 시간이 담긴 고대 신라의 중심지로, 성벽과 도랑, 건물지, 다양한 유물을 통해 그 찬란한 역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다한 월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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