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nglish Japanese

박혁거세 - 신라의 건국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박혁거세(朴赫居世)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신라의 건국 시조로, 그의 이름은 신라의 시조로서 신화적인 탄생설화와 더불어 국가의 기틀을 다진 군주로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69년부터 기원후 4년까지 살았던 그는, 신이한 출생 이야기와 더불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신라의 건국과 초기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

박혁거세의 탄생은 역사적 기록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들 기록에서 혁거세의 출생 이야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그의 탄생은 신성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는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이 양산의 나정 옆에서 말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발견한 큰 알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알에서 나온 아이가 바로 혁거세로, 그의 탄생은 신비로운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유사하지만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삼국유사에서는 6촌의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묘사되고, 6촌 촌장들이 나라를 세울 일을 논의하다가 알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혁거세의 몸에서 광채가 나왔다는 점이 강조되며, ‘혁거세’라는 이름의 유래도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설명됩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인 ‘불구내(弗矩內)’와 서술성모(西述聖母)라는 여신에게서 태어났다는 신화적인 요소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탄생 설화는 단순한 신화라기보다는 당시 신라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고조선 유민들이 삼한 지역으로 남하하면서 6촌이 신라 건국의 모체가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박혁거세의 즉위와 혼인

박혁거세는 13세의 나이에 6부인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릅니다. 이때 그를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부르며,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로 정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6촌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 초기에는 '왕(王)'이라는 호칭 대신 다양한 왕호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왕호는 거서간에서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으로 변천되었으며, 제22대 지증마립간 시기에 이르러서야 '왕'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박혁거세의 왕비알영(閼英)으로, 그녀 역시 신비로운 탄생설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알영은 용이 나타나 옆구리로 태어났으며, 덕이 뛰어나 왕비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이 이야기를 더 상세하게 다루며, 알영의 신체적 특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박혁거세의 치적

박혁거세는 기원전 57년에 즉위하여 약 61년간 신라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외부 세력과의 무력 충돌은 거의 없었으며,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외교적 업적

기원전 50년에는 왜(倭)가 신라를 침범하려 했으나, 혁거세의 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철수하였습니다. 또한, 기원전 28년에는 낙랑이 신라를 침범하려 했으나 도적이 없는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돌아갔습니다. 기원전 5년에는 동옥저에서 사신을 보내 혁거세의 인품을 칭송하며 좋은 말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혁거세가 덕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외부의 위협을 무력보다는 도덕적 권위로 해결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신라가 초기 국가로서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나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마한과의 관계

혁거세는 마한과의 관계에서도 도덕적 가치를 중시했습니다. 기원전 20년에 마한에 호공을 보내 예를 갖췄으나, 마한왕이 공물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에 신라 내에서는 마한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혁거세는 이를 거부하고 마한왕이 죽었을 때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습니다. 이는 외교적 충돌을 피하면서도 신라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국내적 치적

혁거세는 대내적으로도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기원전 41년에는 왕비 알영과 함께 6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습니다. 또한, 기원전 37년에는 수도에 금성을 쌓고, 기원전 31년에는 금성 내에 궁궐을 건설하였습니다.

보물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 (慶州 南山 昌林寺址 三層石塔)
보물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 (慶州 南山 昌林寺址 三層石塔)

삼국유사에 따르면, 혁거세와 알영이 처음 기거한 궁실은 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는 후에 창림사(昌林寺)로 알려졌습니다.

 

박혁거세의 사망과 장례

박혁거세는 기원후 4년에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삼국사기는 혁거세가 담암사 북쪽의 사릉(蛇陵)에 장사지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망 당시 하늘로 올라가 7일 후에 유해가 땅에 떨어졌다는 신화적인 이야기가 전해지며, 큰 뱀이 그의 유해를 합장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5개의 능을 만들고 이를 '오릉(五陵)'이라 불렀습니다.

오릉(五陵)
오릉(五陵)

결론

박혁거세는 신라의 건국 시조로서, 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신화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외부의 위협을 도덕적 권위로 물리치고, 국내에서는 농사와 산업을 장려하며 신라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그의 통치와 치적은 신라의 초기 국가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신라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함께 보면 좋은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