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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다호리 유적: 한반도 철기 시대의 문명과 유산

경남 창원 다호리 1호묘에서 출토된 붓 세 자루와 삭도(오른쪽)
경남 창원 다호리 1호묘에서 출토된 붓 세 자루와 삭도(오른쪽)

 

1. 개요

창원 다호리 유적은 경상남도 창원 주남저수지 인근에서 발굴된 고대 무덤들로, 한반도 남부의 철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입니다. 이 유적은 기원전 1세기 무렵 변한 지역의 지배층이 어떤 생활을 영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다호리 1호 널무덤은 도굴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있어 당시 한반도와 중국 간의 교역 관계와 철기 문화를 밝혀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붓과 삭도(손칼)는 한반도 남부에서 문자를 사용하던 지배 계층의 존재를 확인하게 해주었습니다.

 

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품(삼한)
옻칠한 칼집과 청동 칼(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삼한)
옻칠 굽다리접시(창원 다호리 유적 출토, 삼한) - 왼쪽 / 낙랑 칠기* 낙랑 BC 108~AD 313

 

2. 다호리 1호 널무덤의 발견과 중요성

다호리 유적은 주남저수지의 습지대에 위치해 있어 무덤들이 물에 잠겨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기물, 특히 나무로 만든 유물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다호리 1호 널무덤은 참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이는 나무널이 실제로 출토된 최초의 사례입니다. 널은 둥근 통나무를 반으로 갈라 속을 파낸 형태로, 이전의 네모난 상자형 널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를 보였습니다.

널을 옮길 때 사용된 구멍과 홈도 흥미로운데, 이는 일본 고훈 시대의 수라와 비슷한 구조로 무거운 물체를 운반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다호리 유적과 일본 고훈 시대의 무덤 문화 간의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지리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직접적인 관계를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호리 1호 널무덤은 한반도에서 나무널을 만드는 기술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해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3. 장례 과정과 의식

다호리 1호 널무덤의 주인공은 죽음 이후에도 엄숙한 장례 절차를 거쳤습니다. 무거운 통나무널을 끌어 장지까지 운반하는 과정에서 수라와 같은 도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널무덤에서는 시신과 함께 다양한 부장품이 발견되었습니다. 칠초동검, 철검, 나무 그릇, 유리구슬 목걸이, 쇠도끼 등 당시의 사치품과 무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유물들은 죽은 이와 함께 매장되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무덤 내부에는 시신을 안치한 공간 외에도 부장품을 놓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으며, 그곳에는 대나무 바구니에 담긴 과일과 쇠도끼 등이 놓였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죽은 자를 위로하고, 그들이 저승에서 잘 살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덤 위에는 흙을 덮어 얕은 봉분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는 밤을 뿌리는 등의 의식도 행해졌습니다.

 

4. 붓과 손칼: 지배층의 문자생활

다호리 1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붓과 손칼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문자생활을 영위하던 지배자였음을 보여줍니다. 붓은 글을 쓰는 도구로, 당시의 중요한 기록을 남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손칼(삭도)은 주로 나무나 대나무에 글을 쓴 뒤, 틀린 부분을 지우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다호리 1호 무덤의 주인공은 단순한 무당적 성격의 지배자가 아닌, 문자를 통해 기록을 남기고 교역을 관리하는 지적인 지배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다호리 유적보다 이른 시기에 청동새기개가 발견된 적이 있지만, 그동안 그것이 단순한 공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붓과 손칼은 이를 새롭게 해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손칼은 단순한 공구가 아닌, 기록을 수정하는 도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당시 철을 생산하고 교역을 관리하는 데 있어 문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5. 다호리 유적의 소멸과 미스터리

다호리 유적은 기원전 1세기 한반도 남부에서 중요한 무덤이 위치한 지역이었지만, 기원후 2세기 이후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주남저수지 주변의 언덕을 모두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호리 유적과 이어지는 덧널무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호리 유적이 한때 번성했지만, 그 이후로는 이 지역에서 무덤 문화가 지속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다호리 지역의 사람들이 김해 양동리나 대성동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김해 대성동이나 양동리 지역에서도 이미 널무덤이 존재했으며, 이 지역의 무덤 문화는 자연스럽게 덧널무덤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다호리 유적의 소멸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그 사람들의 동향은 불확실한 상태입니다.

 

 

결론

창원 다호리 유적은 한반도 남부 철기 시대의 문명과 교역, 지배층의 생활상을 밝혀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특히 다호리 1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붓과 손칼은 당시 지배층이 문자를 사용하여 기록을 남기고 교역을 관리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호리 유적은 기원후 2세기 이후로 사라지며, 그들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호리 유적의 소멸과 관련된 미스터리로, 향후 연구가 더욱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