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nglish Japanese

경산 양지리 유적과 한나라 동전: 그 시대의 지배자를 엿보다

1. 경산 양지리 유적의 발견

경산 양지리 유적은 영남 중부 지방의 중심을 흐르는 금호강 중류 지역에 위치한 중요한 유적지로, 한반도 역사와 문화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에서 기원전 1세기경,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인물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특히, 1호 널무덤은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어 만든 나무판 속에서 다수의 쇠도끼, 청동거울, 중국 한나라 동전(오수전), 청동 무기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

이 무덤의 유물들은 기존의 한반도 청동기 시대 유물과는 달리 한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이를 통해 한반도 남부 지역과 중국 한나라 사이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 양지리 1호 널무덤: 한반도 남부와 한나라의 관계

양지리 1호 널무덤은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설치된 직후, 한반도 남부에서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무덤을 만들기 위한 순서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나무널을 묻기 위한 구덩이를 파고, 그 중앙에 '요갱'(腰坑)이라는 추가적인 구덩이를 더 파서 여기에 꺾창, 투겁창, 자귀 같은 무기들을 담아둔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나무널을 구덩이에 안착시키고, 내부에 망자의 시신과 함께 여러 유물들을 배치한다. 마지막으로 무덤을 흙으로 덮고 제사를 지내는 절차로 완성된다.

이 무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다양한 무기류뿐만 아니라 중국 한나라의 동전인 오수전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꺾창집에 오수전 26개가 장식된 점은 매우 독특한데, 이는 중국과의 교류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화폐의 상징적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3. 오수전의 상징적 의미

오수전(五銖錢)은 중국 한나라 무제 시기(기원전 119년)에 처음 주조된 동전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동전이다. 동전의 모양은 둥근 외형에 네모난 구멍이 나 있으며, 무게 단위인 '수(銖)'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오수전은 한무제 시기에 처음 등장한 후, 한나라 멸망 후에도 오랜 기간 사용되었으며, 한반도에서도 여러 유적지에서 출토된 바 있다. 하지만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처럼 무기 케이스에 동전을 장식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는 단순히 화폐로서의 기능을 넘어선,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장식은 당시 중국의 귀중한 문물이었으며, 지배자의 권위와 부를 상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지배자의 삶과 문화적 교류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의 주인공은 당시 경산 일대를 호령했던 지배자로 추정된다.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그의 삶이 단순한 토착 지배자가 아니라, 중국 한나라와의 긴밀한 교류 속에서 다양한 외래 문물을 받아들였던 인물임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거울 세 개 중 두 개는 소명경(昭明鏡)과 군망망경(君忘忘鏡)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성운문경(星雲文鏡)이었다.

경북 경산시 하양읍 양지리 목관묘에서 발굴된 중국 전한 시기 청동거울 3개와 청동제 유물들. 경산시립박물관

특히, 군망망경은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된 거울 중 가장 큰 것으로, 당시 한반도 남부 지역 지배자들이 한나라로부터 귀중한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는 한나라가 남한의 지배층을 포섭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선물을 증정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또한, 무덤에서는 청동검과 철검이 각각 두 자루씩 출토되었는데, 모두 칼집에 넣어진 채 발견되었다. 이들 칼집의 장식은 평양 정백동에서 발견된 것들과 유사한 양식으로, 당시 한반도 북부와 남부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철과 식료품의 유통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에서 대량의 쇠도끼가 출토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쇠도끼는 당시 교환의 척도로 사용된 것으로, 무덤 속에 많은 양의 쇠도끼가 함께 매장된 것은 무덤 주인이 대량의 철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한반도 남부가 철을 중심으로 한 경제 활동이 활발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무덤 내부에서 숭어, 복숭아, 참외와 같은 음식물이 발견된 점도 흥미롭다. 숭어는 바다 생선으로, 경산과 같은 내륙 지역에서 바다 생선이 제사용으로 사용된 것은 당시 식료품의 유통 범위가 광범위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소금에 절인 생선이 오랜 거리를 이동하며 유통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6. 중국 문화와의 융합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중국과의 문화적 융합을 잘 보여준다. 비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구슬이나 호랑이 모양의 허리띠 장식은 중국에서 수입된 비단과 진한의 전통을 동시에 반영한 것이다. 이를 통해 무덤 속 지배자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의 전통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은 단순한 무덤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 묻힌 지배자는 진한 지역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위와 정체성을 강화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한반도 남부 지배자들의 삶과 문화적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한반도 역사의 중요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

 

7. 결론: 이천 년의 세월을 넘어 전하는 이야기

경산 양지리 1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천 년 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인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가 속한 사회의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진한의 전통을 지키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고, 철과 같은 귀중한 자원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과시했다.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은 당시 한반도 남부 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경산 양지리 유적은 단순한 고고학적 유물 발굴을 넘어서, 한반도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는 유적지로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지배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들의 권위와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