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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의 위상과 순장의 흔적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개요

고령 지산동 고분군(高靈 池山洞 古墳群)은 경상북도 고령군에 위치한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사적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4세기 말부터 6세기 중엽까지 대가야(大伽倻) 지배자들의 무덤으로 조성되었다. 총 704기의 봉토분이 조성되어 있으며, 발굴 조사 과정에서 순장(殉葬)의 흔적이 발견된 중요한 유적지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가야 연맹의 중심 역할을 했던 대가야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적인 사적이다.

 

고분군의 입지와 분포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고령 주산성 인근에 조성되어 있다. 봉토분들은 길이 2.4km, 폭 1km의 범위에 걸쳐 있으며, 주산(主山)의 남쪽과 동쪽 능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봉분은 규모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대형 무덤: 직경 20m 이상의 대형 고분들은 능선 정상부나 주요 지점에 위치해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한다.
  • 중형 무덤: 읍내 쪽으로 뻗은 능선과 그 주변에 주로 분포한다.
  • 소형 무덤: 고분군 전역에 산재하며 중·대형 무덤 주위에도 존재한다.

이러한 분포는 대가야가 형성기부터 멸망기까지 정치적·사회적 중심지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주변에 고령 주산성과 대가야 궁성지(宮城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위치한 점도 대가야의 위상을 증명한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高靈 池山洞 古墳群)
고령 지산동 고분군(高靈 池山洞 古墳群)

 

발굴과 연구의 역사

지산동 고분군의 첫 발굴 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06년에 일본 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조사된 47호분과 절상천정총(折上天井塚)은 대가야의 순장 풍습을 확인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학술 조사는 해방 이후 진행되었다.

  • 1977~1978년: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가 주요 고분(32~35호분)을 발굴했다.
  • 1990년대 이후: 영남문화재연구원,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등에서 추가 발굴이 이루어졌다.

2000년 이후: 다양한 문화재 연구기관이 지속적인 발굴과 연구를 이어가며 고분군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대가야의 위상과 지배 구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가야는 고령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의 핵심국이었다. 금관가야의 쇠퇴 이후, 대가야는 고령 지역에서 새로운 중심국으로 성장하여 5세기 후반에는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외교적 위상을 높였다.

대가야는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로 성장하며 남강과 섬진강 유역을 포함한 남부 지역과 활발히 교류했다. 토기, 철기, 금동제 무기와 마구 등의 유물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며, 당시의 경제적 번영과 교류를 증명한다.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중 고령양식 토기금제 귀걸이는 대가야의 지배층이 지방 수장층과 교류하며 영향력을 행사한 증거로 여겨진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한국사의 모든 고분군 중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로 순장을 했던 고분군이다.

 

순장: 지배자를 위한 장례 의식

순장의 의미와 역사적 사례

순장(殉葬)이란 지배자가 죽을 때 생존한 인물이나 동물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 풍습이다. 이집트, 중국, 스키타이 등 고대 문명에서 순장이 행해졌으며, 한국에서도 신라 초기와 가야에서 그 흔적이 발견된다. 지산동 고분군의 고분들은 대규모 순장이 이루어진 대표적인 예다.

 

지산동 고분군의 순장 사례

고분군에서 확인된 대표적인 순장묘는 32호분, 34호분, 44호분 등이다. 이들 고분에서는 주인공 외에도 다수의 순장자가 함께 매장된 형태가 발견되었다.

  • 44호분: 주실과 두 개의 부실을 포함하며, 주변에 32기의 순장곽이 배치되었다. 순장된 인원은 남녀 혼합으로 총 32명에 달했다.
  • 45호분: 주실과 부실 외에 11기의 순장곽이 있으며, 총 12명이 순장되었다.
  • 30호분: 주실과 부실 외에 순장곽 5기를 포함하며, 최소 7명이 순장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고분에서는 순장자들의 유해와 함께 다양한 토기, 금동제 관(冠)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30호분의 순장곽에서 발견된 보주형 금동관은 지배층의 아이로 추정되는 피장자가 착용한 것으로, 대가야의 계급 사회와 순장의 상징적 의미를 잘 보여준다.

 

대가야의 정치·경제적 통합과 고분 조성

대가야는 고령을 중심으로 남부 지역의 여러 수장국들과 교류하며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했다. 이러한 교류의 결과로 지산동 고분군의 조성이 가능했다.

  • 유물의 분포: 대가야에서 출토된 금제 귀걸이와 토기가 여러 지역 고분에서 발견되며, 대가야의 영향력을 증명한다.
  • 공납 관계: 대가야는 유물을 선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공납물을 받는 방식으로 정치·경제적 통합을 이루었다.

지산동 고분군의 고분들은 단순한 무덤이 아닌 정치적 상징과 경제적 번영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의 제32호 무덤에서 발굴된 ‘금동관’(보물)
지산동 고분군의 제32호 무덤에서 발굴된 ‘금동관’(보물). 국가유산청 제공

 

결론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지로, 가야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특히 순장 의식과 같은 독특한 장례 문화를 통해 대가야 지배층의 위계와 통치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대가야의 유산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것은 한반도 고대사의 중요한 단면을 조명하는 일이며, 이 유적지는 현재까지도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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