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전지왕(腆支王, 미상 ~ 420년)은 백제의 제18대 왕으로, 어린 시절 왜(倭)에 인질(質子)로 보내졌으나 아버지 아신왕(阿莘王)이 죽은 후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백제 왕족과 해씨(解氏) 가문을 중심으로 국내 정치를 재편했으며,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전지왕의 가계와 태자 시절
전지왕의 본명은 부여영(夫餘映) 또는 여영(餘映)이며, 중국 『송서(宋書)』에는 부여전(夫餘腆)으로 기록된다. 그는 아신왕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다. 팔수부인은 해씨, 진씨(眞氏), 혹은 왜계 출신이라는 여러 설이 있지만, 해씨 가문 출신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전지왕과 팔수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제19대 구이신왕(久爾辛王)이다.
전지왕의 재위 기간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405년부터 420년까지다. 그러나 『송서』에는 그가 424년 이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428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왜에서의 인질 생활
아신왕 치세 때,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패배하면서 위기에 처했다. 396년, 고구려가 백제 수도 한성을 포위하자 아신왕은 고구려에 항복하고, 왜와 우호를 맺어 군사 지원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397년, 태자 전지가 왜에 인질로 보내졌다.
왜에서 전지는 23년 동안 머무르며 백제와 왜의 가교 역할을 했다. 왜군이 가야와 고구려 대방(帶方) 지역에 파병할 수 있었던 것도 전지왕의 설득 덕분이었다. 또한 그는 왜에서 정치적 지지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 덕분에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왜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왕위 계승과 귀국
405년 9월, 아신왕이 30대 초중반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왕세자인 전지는 왜에 머물고 있었고, 이로 인해 백제 내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아신왕의 동생 훈해(訓解)가 왕위를 대신하며 전지의 귀국을 기다렸으나, 막내 동생 설례(碟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지는 왜왕에게 100명의 호위군을 받아 귀국했다.
해충(解忠)이라는 인물이 설례의 반란 소식을 전하며 경고하자, 전지는 잠시 바닷가 섬에 머무르며 상황을 주시했다. 이후 백제 귀족과 국민들이 설례를 제거하고 전지를 왕위에 올렸다.
전지왕의 국내 정치
전지왕은 왜에서 오랫동안 체류한 탓에 국내 지지 기반이 약했다. 따라서 그는 해씨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국을 재편했다.
- 406년: 해충을 달솔(達率)로 임명하고 조(租) 1천 석을 하사
- 407년: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
이처럼 해씨 가문이 주도권을 잡으며, 해씨 세력의 영향력은 웅진 시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상좌평 제도의 도입
전지왕은 왕위 찬탈 경험을 교훈 삼아 왕권을 강화하고자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도입했다.
- 408년, 전지왕은 왕족인 여신(餘信)을 상좌평에 임명해 군무와 정사를 총괄하게 했다.
- 상좌평은 고려시대의 총재와 비슷한 역할을 했으며, 왕족이 중심이 되어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상좌평 제도는 해씨 세력의 권력 보호 수단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외 관계: 고구려와의 외교적 견제
전지왕은 즉위 후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외교를 통한 견제를 택했다.
- 동진(東晉)과의 외교를 강화해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
- 416년, 동진으로부터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使指節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으로 책봉
왜와의 관계 유지
전지왕은 왜에서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즉위 후에도 우호 관계를 지속했다.
- 409년, 왜가 백제에 야명주(夜明珠)를 선물하자, 전지왕은 비단 10필을 답례로 보냈다.
전지왕의 외교 정책은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피하면서, 필요할 때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한 현실적 조치였다.
결론
전지왕은 왜에서의 인질 생활을 딛고 백제 왕위에 올라 정치적, 외교적 안정화를 이루었다. 그는 해씨 가문을 중심으로 정권을 재편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상좌평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외교를 통해 고구려를 우회적으로 견제하며 동진 및 왜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그의 실용적인 정치와 외교는 백제의 국력 회복과 왕권 안정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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