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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古爾王): 백제 국가체제의 확립자

고이왕(古爾王, ?~286)은 백제 제8대 왕으로, 234년부터 286년까지 53년간 재위했다. 그는 백제를 고대 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좌평제관등제의 설치, 공복 제정, 율령 반포를 통해 백제의 통치 체계를 정비했다. 또한 마한의 영도세력으로 성장하고, 한(漢)의 군현과 맞서 싸우며 대외적으로도 백제의 국력을 확장했다.

 

6좌평제는 재상 관직의 성격을 가진 좌평을 맡은 직무에 따라 6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국가가 발전하면서 행정 업무의 범위와 양이 크게 늘어나자,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업무를 나누었다. 그리고 최고 직위인 좌평이 행정 업무를 나누어 관장하는 체제를 마련한 것이다. 6좌평제가 된 것은 백제가 관제를 정비하면서 중국의 6전(六典) 제도, 곧 국가 행정 업무를 6개의 큰 범주로 나눈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6좌평의 업무 분장은 다음과 같다. ①내신좌평(內臣佐平): 왕명 출납, ②내두좌평(內頭佐平): 창고⋅재정, ③내법좌평(內法佐平): 예법⋅의례, ④위사좌평(衛士佐平): 왕궁 수비, ⑤조정좌평(朝廷佐平): 형벌⋅감옥, ⑥병관좌평(兵官佐平): 지방 군사.

 

백제의 관등은 그 사람의 지위를 보여 주는 지표인 동시에 그가 맡은 직책이란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백제에는 16관등(十六官等)이 있었다. 제1등은 좌평(佐平)이었다. 좌평은 처음에는 하나만 있다가 3~5종으로 분화되었다. 최종적으로는 총괄하는 업무에 따라 6좌평제로 정착되었다.

제2등에서 제6등까지는 ‘솔(率)’ 자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 ‘솔계’ 관등은 유력한 세력 집단의 수장에게 수여되었다. 제2등 달솔(達率)의 경우 다른 관등과 달리 정원이 30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보통 좌평과 달솔이 국정 운영을 위한 최고 귀족 회의의 구성원이었다고 본다.

제7등에서 제11등까지는 공통적으로 ‘덕(德)’ 자가 사용되어, 상위 및 하위 관등과 구분되어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였다. 이 ‘덕계’ 관등은 ‘솔계’ 관등보다 세력이 약한 집단의 유력자들에게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제12등에서 제16등까지의 관등은 중⋅하위급 실무직 종사자들에게 수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16관등은 260년(백제 고이왕 27년)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는 백제 관등이 처음 설치되기 시작한 시기이고, 16관등이 완성된 것은 성왕(聖王, 재위 523~554) 대로 보인다.

관등 관등명 업무
1 내신좌평(內臣佐平) 왕명 출납
내두좌평(內頭佐平) 창고⋅재정
내법좌평(內法佐平) 예법⋅의례
위사좌평(衛士佐平) 왕궁 수비
조정좌평(朝廷佐平) 형벌⋅감옥
병관좌평(兵官佐平) 지방 군사
2 달솔(達率)  
3 은솔(恩率)  
4 덕솔(德率)  
5 한솔(扞率)  
6 나솔(奈率)  
7 장덕(將德)  
8 시덕(施德)  
9 고덕(固德)  
10 계덕(季德)  
11 대덕(對德)  
12 문독(文督)  
13 무독(武督)  
14 좌군(佐軍)  
15 진무(振武)  
16 극우(剋虞)  

 

삼국사기 고이왕 기사
삼국사기 고이왕 기사

 

고이왕의 출계와 왕위 계승

이원적 왕계설과 왕위 계승 갈등

고이왕의 즉위와 왕계에 관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백제 초기의 왕계가 두 계통으로 나뉘었다고 주장한다. 주몽(朱蒙)의 아들인 온조(溫祚) 계열과 비류(沸流) 계열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즉, 초고왕(肖古王)-구수왕(仇首王)-사반왕(沙伴王) 계열과 고이왕(古爾王)-책계왕(責稽王) 계열이 다른 혈통에서 왕위를 이어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복 아우(모제)라고 전하지만, 이를 ‘어머니의 동생’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주장도 있어 이때 왕계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다른 학자들은 온조왕의 후손들이 단일 계통으로 왕위를 계승했다고 본다. 고이왕이 사반왕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은 국가적 위기 속에서 비상조치였으며, 왕실 내 세력의 재조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이왕의 즉위는 온조계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고이왕의 국가 체제 정비와 왕권 강화

좌평제와 관등제의 설치

고이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군사와 행정 체제를 정비했다. 그는 240년에 좌장(左將)이라는 군사 직책을 신설하고, 내외의 군사 권력을 장악했다. 또한 260년부터 262년까지 정력적으로 국가 체제를 재편했는데, 특히 6좌평과 16관등제를 도입하며 백제의 위계질서를 확립했다. 좌평제는 왕권을 보좌하며 행정과 군사를 나누어 통치하기 위한 중요한 기구였고, 1품 좌평부터 최하위 16품 극우(克虞)까지 관직 체계를 명확히 하여 관료들을 통제했다. 이와 함께 관등에 따라 공복(公服)의 색을 다르게 정하는 공복제를 시행하여 신하들의 위계를 시각적으로 나타냈다.

율령 반포와 통치 조직 정비

262년, 고이왕은 뇌물을 받은 관리와 도둑질한 자에게 엄벌을 내리는 형법을 공포했다. 이는 백제에 율령(律令) 체제가 도입된 증거로 보인다. 율령은 법률과 행정 규정을 포함한 성문법 체계로, 이를 통해 백제는 보다 조직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했다. 고이왕이 추진한 제도 정비가 단 3년 만에 이루어졌다는 기록에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지만, 이 시기 백제가 한 단계 도약한 것은 분명하다.

 

 

고이왕대의 대외 관계: 한군현과의 충돌

낙랑·대방군과의 항쟁

백제는 고이왕대에 한반도 북부의 한(漢) 군현과 충돌하며 국력을 키웠다. 246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이왕은 이 틈을 타 낙랑의 변방을 습격했다. 비록 잡아왔던 주민들을 낙랑에 돌려보내며 전쟁은 소극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는 백제가 한 군현과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진한(辰韓)의 정치 세력과 함께 대방군(帶方郡)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전사했으며, 이를 통해 백제는 마한의 영도 세력으로 자리 잡고 국력을 더욱 확장했다.

 

고이왕의 역사적 의의

고이왕은 백제가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좌평제, 관등제, 공복제의 정비와 율령 반포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 체계를 조직화한 점은 백제의 중앙집권적 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마한과 한 군현 사이의 충돌을 주도하면서 백제는 지역의 패권 세력으로 성장했다. 고이왕이 이루어낸 체제 정비와 군사적 업적은 책계왕과 분서왕대의 왕위 계승으로 이어지며 백제 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결론

고이왕은 백제의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며 고대 국가의 틀을 마련한 군주였다. 그의 재위 동안 이루어진 관등제와 율령 반포, 왕권 강화는 백제의 통치 체제를 더욱 정비하고 왕조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대외적으로도 한 군현과 대등하게 맞서며 국력을 신장시켰고, 이를 통해 백제는 남부와 중부의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고이왕의 업적은 단순히 한 명의 왕의 통치 성과를 넘어 백제사의 중요한 발전 단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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