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nglish Japanese

미천왕(美川王) – 소금장수에서 고구려의 왕이 되다

개요

미천왕(美川王, ?~331년)은 고구려의 제15대 왕으로, 을불(乙弗)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도망쳐 머슴살이와 소금장수를 하며 생활하던 그는, 봉상왕(烽上王)의 실정이 거듭되자 신하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재위 동안 서안평과 낙랑·대방군을 점령하며 영토를 확장해 고구려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 가계와 즉위 과정

미천왕은 서천왕(西川王)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서천왕의 둘째 아들인 돌고(咄固)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배경에는 큰아버지인 봉상왕의 폭정이 있었습니다. 봉상왕은 인재를 의심하고 시기하여 숙부 달가(達賈)와 을불의 아버지 돌고를 죽였고, 을불은 도망쳐 비참한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을불의 고단한 생활

을불은 수실촌에서 머슴으로 일했으나 1년 만에 떠나 소금장수가 됩니다. 하지만 압록강 근처에서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려 소금도 빼앗기고 태형을 당하며 더욱 곤궁한 처지에 놓입니다.

봉상왕의 폐위와 미천왕 즉위

봉상왕의 무능한 통치로 고구려는 재난과 흉년에 시달렸고, 이에 국상 창조리(倉助利)는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을불을 왕으로 옹립합니다. 이렇게 을불은 300년 고구려의 15대 왕으로 즉위하며 '미천왕'으로 불리게 됩니다.

 

2. 낙랑·대방군 점령

미천왕 재위 초 중국에서는 서진(西晉)의 내분이 극심해지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를 틈타 미천왕은 현도군을 공격해 8천 명을 포로로 잡고, 311년에는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해 요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합니다.

낙랑·대방군의 멸망

미천왕은 313년에 낙랑군을, 314년에 대방군을 정복합니다. 이로써 중국 군현 세력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낙랑과 대방 지역은 고구려의 경제·문화 발전에 중요한 자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지역의 점령은 요동 진출을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3. 모용선비와의 관계

미천왕은 요동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하던 모용선비(慕容鮮卑)와 충돌하게 됩니다. 모용외(慕容廆)는 302년에 선비족을 통일하며 세력을 키웠고, 미천왕과의 갈등이 본격화됩니다.

고구려와 모용씨의 전투

미천왕은 모용씨와의 충돌을 피해 낙랑과 대방을 먼저 점령한 후 요동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모용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고 화친을 맺기도 했습니다. 미천왕은 후조(後趙)의 왕 석륵(石勒)과 연합을 모색하며 외교적 방법으로 요동 진출을 도모했으나, 그 계획은 미천왕의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합니다.

 

4. 미천왕의 사망과 무덤 논란

미천왕은 331년에 사망하며, 미천지원(美川之原)에 묻히고 왕호를 ‘미천왕’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 342년, 전연(前燕)의 왕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를 침략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탈취합니다. 모용황은 이를 통해 고구려의 힘을 꺾고자 했고, 결국 343년에야 시신이 반환되었습니다.

미천왕릉 논란

북한의 안악 3호분이 한때 미천왕의 무덤으로 주장되었으나, 현재는 고국원왕의 묘로 추정됩니다. 또 중국 통구(通溝)의 서대총(西大塚)도 미천왕릉으로 거론되지만 명확한 근거는 부족합니다.

 

5. 미천왕의 역사적 의의

미천왕은 비참한 생활 속에서 왕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을 점령해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몰아내고, 경제·문화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그의 정복 활동은 요동 진출과 고구려의 대외 확장을 위한 기반을 닦았습니다.

미천왕의 업적은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의 극적인 삶과 통치 과정은 고구려 왕권의 변화와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미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의 업적을 통해 고구려가 어떻게 한반도에서 중국의 군현을 몰아내고 강대국으로 성장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