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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고분: 죽은 이의 쉼터에 새긴 그림

고구려벽화 강서대묘
고구려벽화 강서대묘

1. 개요

고구려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를 안식처로써 무덤을 만들고, 그곳의 널방 벽에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들은 3세기 중엽부터 7세기 전반까지 제작된 것으로, 고구려 사회의 사상,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담고 있습니다.

 

강서대묘
강서대묘

 

2. 고구려 벽화 고분의 등장 배경

돌무지무덤에서 벽화고분으로

고구려 초기에는 돌무지무덤 형태의 무덤이 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강돌과 산자갈을 쌓아 올린 무덤으로, 내부에 별도의 공간이 없어 벽화 제작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313년, 고구려가 낙랑군을 정복하면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낙랑군은 한나라(漢)에서 한반도에 세운 지방 행정 단위로, 중국의 문화가 전파된 지역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낙랑군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무덤 형식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중국의 영향과 돌방무덤

중국 한대(漢代)에서는 무덤 내부를 벽화로 장식하는 문화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낙랑군 지역의 돌방무덤과 장식 방식은 고구려에 영향을 미쳤고, 이후 평양 지역에서 벽화가 그려진 돌방 흙무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무덤은 중국의 벽돌무덤 형식을 닮았으며, 요동 지역의 한대 무덤처럼 큰 돌을 사용해 내부를 구성했습니다.

고구려 내에서도 지역별로 무덤 양식의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국내성(집안) 지역에서는 기존의 돌무지무덤이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벽화가 유행하면서 돌방을 갖춘 무덤이 점차 증가했습니다.

 

 

3. 고분 벽화의 제작 방법

고구려 벽화는 제작 기법에 따라 크게 화장지법조벽지법으로 구분됩니다.

화장지법(化粧地法)

초기 벽화는 무덤 벽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회가 마르기 전에 채색하는 습지벽화법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안료가 벽면에 스며들어 보존성을 높여 주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반면, 마른 회벽에 그림을 그리는 건지벽화법은 색감이 선명하지만 보존성은 떨어졌습니다.

조벽지법(粗壁地法)

후기로 갈수록 벽에 회칠을 하지 않고, 잘 다듬은 돌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때 광물성 가루를 안료로 사용하고, 해초나 동물성 아교를 섞어 채색의 내구성을 강화했습니다. 그림 위에 얇은 석회 막을 덧입혀 벽화를 오래도록 보존하는 기술도 활용되었습니다.

 

 

 

4. 벽화 주제의 변화

1기: 생활 풍속 중심(4~5세기 전반)

초기 벽화는 고인의 생전 일상을 재현한 것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무덤 주인과 그 가족이 시종들의 시중을 받는 모습, 사냥 장면, 연회와 가무 등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무덤 내부를 마치 목조 건축물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기둥이나 도리, 보 등의 구조를 벽에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2기: 장식 무늬와 불교적 요소의 등장(5세기 중엽~6세기 초)

중기 벽화에서는 기존의 생활 풍속 외에도 연꽃 무늬와 같은 장식 요소가 등장합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으로, 고구려인의 내세관이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시기에는 사신도(四神圖)의 일부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후기에 더욱 발전된 형태로 이어집니다.

 

청룡도(복원후)
청룡도(복원후)

1) 청룡도
용은 선사시대부터 고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숭앙되던 신화적 동물로 동방을 상징한다. 포효하는 듯 크게 벌린 입에서는 붉은 기운이 강렬하게 뻗쳐 나오고, S자형으로 흘러내린 목선과 몸통부분에는 푸른색, 녹색, 붉은색을 번갈아 채색하였다. 그 위에 검은 망사무늬의 비늘을 묘사하여 신비롭고 화려한 용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슴 양옆으로 꿈틀거리듯 붉은 색으로 묘사된 화염무늬 형태의 날개와 도약하려는 듯 크게 벌린 앞 다리의 자세에서 진취적이며 활달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백호도(복원후)
백호도(복원후)

2) 백호도
호랑이는 청룡과 달리 실재하는 동물로, 그 용맹스러움으로 인해 원시시대부터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오행사상에서 서방을 상장하는 동물이다. 악귀를 쫓아내려는 듯 부리부리하게 치켜 뜬 눈과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크게 벌린 입에서 백호의 용맹성을 엿볼 수 있다. S자형의 목선, 계단형으로 마무리된 꼬리, 앞 다리를 위 아래로 힘껏 벌린 자세는 청룡도와 매우 유사하다. 가슴부분에 묘사된 선명한 색채의 붉은 날개가 신수로서의 백호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청룡도와 마찬가지로 유려하면서도 힘찬 필선을 보여준다.

 

주작도(복원후)
주작도(복원후)

3) 주작도
주작도 청룡과 같은 상상의 동물이며 남방을 상징한다. 그 모습은 봉황과 흡사하다. 힘차게 퍼덕이는 날개와 회오리치듯 말아 올린 꼬리의 강렬한 곡선, 온몸에서 불길처럼 뿜어 나오는 깃털, 붉은 색과 녹색의 기운이 감도는 화려한 모습은 불의 기운을 지닌 남방의 신수로서의 주작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주작의 발아래 묘사된 불그스레한 산악도는 화면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현무도(복원후)
현무도(복원후)

4) 현무도
현무는 북방의 흑색을 뜻하는 현(玄)과 거북의 견고한 등껍데기를 상징하는 무(武)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북방을 상징하는 수호신이다. 고대의 신화전설에 의하면 거북은 수컷이 없어 잉태하려면 그들과 머리가 비슷하게 생긴 뱀과 짝을 지어야 하였기 때문에 화면에 보이는 이들의 교묘한 엉킴은 투쟁이 아닌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북을 휘감은 뱀의 긴 타원형 곡선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거북과 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화면에 역동성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 현무도는 거북의 안정감 있는 자세와 뱀의 탄력적인 곡선이 절묘하게 조화된, 고구려 최고의 현무도상으로 간주된다.

 

 

동방의 청룡, 서방의 백호, 남방의 주작, 북방의 현무로 대표되는 사신개념은 중국 고대의 오행사상 및 천문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서대묘는 벽면에 묘사된 사신 이외에도 천정 중앙에 황룡이 묘사되어 완벽한 오행사상을 구현시키고 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회화기법 측면에서도 절정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잠시의 주저함 없이 일필로 휘두른 유려한 선과 화려한 색채,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 넘치는 사신의 모습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구려인들의 웅혼한 민족적 기상과 예술적 혼을 전달해 주고 있다.

 

3기: 사신도의 유행(6세기 중엽~7세기 전반)

후기 벽화의 중심은 사신도입니다. 널방이 한 칸인 외방무덤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네 방향을 수호하는 신들이 묘사되었습니다. 평양 지역의 사신도는 단순한 구도로 표현된 반면, 집안 지역에서는 복잡하고 화려한 배경이 강조되었습니다.

 

5. 벽화와 고구려사의 변화

고구려 벽화의 변화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변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지역 간 문화적 차이

고구려가 평양을 점령한 초기에는 중국식 복장이 많이 등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유의 복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면서 통합적 문화를 형성했음을 보여 줍니다.

6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는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립체제가 등장하면서 지역별 독립성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평양과 집안 지역의 벽화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불교에서 도교로의 변화

7세기 초부터 고구려에서는 도교가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은 643년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 도교를 수용하겠다고 요청하고, 불교 사원도사(道士)들이 머무는 장소로 바꾸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사신도가 중심 주제로 부상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6. 고구려 벽화고분의 의미

고구려 벽화고분은 단순한 무덤 장식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변동을 반영하는 중요한 문화 유산입니다. 문헌 자료가 부족한 고구려사 연구에서 벽화는 고대인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타임캡슐과도 같습니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당시 고구려인들의 세계관과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자, 고구려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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