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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돌무지무덤: 돌로 쌓아 올린 사자의 안식처

적석총(積石塚)
적석총(積石塚)

개요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은 ‘적석총(積石塚)’이라고도 불리며, 고구려 특유의 무덤 양식을 대표하는 유산이다. 초기에는 단순한 돌무더기 형태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이용해 계단식 구조로 발전하였다. 이 무덤 양식은 주로 왕족과 고위 계층의 안식처로 사용되었으며, 왕릉급 돌무지무덤의 정점으로 장군총이 널리 알려져 있다.

 

고구려 무덤 형식에 대한 문헌 기록

고구려 무덤에 관한 기록은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에는 고구려인들이 결혼 후 곧장 장례 준비를 시작하고, 사후에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문헌에서는 고구려 무덤을 돌로 쌓고 주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언급한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국천왕의 왕후였던 태후 우씨의 장례 이야기가 등장한다. 산상왕과 재혼했던 그녀가 사망한 후 고국천왕의 영혼이 꿈에 나타나 무덤 앞을 가려달라고 요청하자, 산상왕릉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돌무지무덤이 고구려 장례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중국의 『양서(梁書)』에는 고구려에서 덧널(곽, 槨)은 사용하였지만 관(棺)을 쓰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고구려가 특정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매장 시설을 운영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다. 고구려의 무덤 내부 구조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했음을 암시한다.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유형과 변화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특히 지금의 중국 요령성(遼寧省) 환인(桓仁)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 지역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무덤이 발견된다. 집안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수천 기의 무덤이 남아 있어 "무덤의 도시"로 불리며 고구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다.

주요 고분군과 장군총

집안 지역에는 크게 6개의 고분군이 있다:

  • 마선구 고분군(麻線溝古墳群)
  • 칠성산 고분군(七星山古墳群)
  • 만보정 고분군(萬寶汀古墳群)
  • 산성하 고분군(山城下古墳群)
  •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
  • 하해방 고분군(下解放古墳群)

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무덤은 우산하 고분군에 위치한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계단식 돌무지무덤의 대표작으로, 고구려 후기 무덤의 발전된 양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초기의 모든 돌무지무덤이 장군총과 같은 형태를 띠지는 않았다.

 

돌무지무덤의 구조 변화

초기 돌무지무덤은 강돌과 산자갈 등 자연석을 사용해 지표면 위에 단순히 돌을 쌓는 방식이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다듬은 돌을 사용해 무덤의 가장자리에 단(壇)을 쌓고, 그 위에 돌을 올리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계장식(階墻式)과 계단식(階段式)

돌무지무덤은 조성 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1. 계장식 돌무지무덤: 일정한 간격으로 돌 담장을 세우고, 그 사이를 돌로 채우는 방식
  2. 계단식 돌무지무덤: 한 층씩 돌을 쌓아 계단 형태를 이루는 방식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계장식보다 발전된 형태로, 분구(무덤의 봉분)도 더 높게 조성되었다. 장군총은 이러한 계단식 무덤의 정점에 해당하며, 완성도 높은 구조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내부 구조와 매장 방식

대부분의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시간이 흐르며 원형이 훼손되었지만, 일부 대형 무덤에서는 내부 구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천추총(千秋塚), 태왕릉(太王陵), 그리고 장군총 등 왕릉급 무덤에는 돌방(石室)이 존재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무덤은 내부 시설이 무너져 돌덧널(石槨) 혹은 나무방(木室)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고구려 무덤 양식의 특징과 새로운 무덤의 등장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지하가 아닌 지면 위에 묘를 조성한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사후를 단순히 ‘묻는다’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창건 신화 속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이야기도 이와 관련이 깊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며, 생전에 사용하던 옥채찍만 대신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고구려인들의 사후 세계관이 단순한 매장이 아닌 하늘로 돌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구려의 많은 고분 벽화에서 죽은 이의 생전 생활 모습을 묘사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군총 이후의 변화: 돌무지무덤에서 돌방 흙무덤으로

장군총을 마지막으로 집안 지역에서는 왕릉급 돌무지무덤의 조성이 중단되었다. 이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지면서 왕릉 역시 평양에서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무덤 양식인 돌방 흙무덤(石室封土墳)이 채택되었다.

4세기 이후부터 고구려는 돌무지무덤 대신 흙을 덮은 돌방무덤을 선호하게 되었고, 두 무덤 양식이 한동안 공존했다. 평양으로 천도한 왕실은 더 이상 돌무지무덤의 전통을 고수하지 않고 새로운 양식의 무덤을 통해 고구려 후기 문화를 반영하였다.

 

결론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단순한 매장지가 아니라 고구려인의 사후관과 신념이 담긴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지하가 아닌 지면 위에 조성된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특유의 세계관을 보여주며, 장군총은 그 정점에 있는 기념비적 유물이다. 그러나 장수왕의 천도를 기점으로 돌무지무덤의 전통은 점차 사라지고, 돌방 흙무덤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이처럼 고구려의 무덤 양식은 역사의 흐름과 왕권의 이동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이는 고대 동아시아 장례 문화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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