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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검단리 유적과 청동기시대 마을

울산 검단리 유적
울산 검단리 유적

1. 개요

청동기시대의 마을을 상상하면, 우리는 흔히 조용한 농촌 마을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 속에는 작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가축들이 마당을 오가며, 마을 바깥으로는 넓은 논과 밭이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이 평화로운 장면은 청동기시대가 안정적이고 단순한 농경 사회였을 것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 상상입니다. 그러나 울산 검단리 유적이 발굴되면서 이러한 고정관념이 깨졌습니다.

울산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에서 발견된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환호'로 둘러싸인 마을입니다. 환호는 마을 주변에 도랑을 파서 외부와 경계를 나눈 구조로, 마을을 보호하는 일종의 방어 시설입니다. 울산 검단리 유적은 해발 200m 정도의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싼 환호와 기둥 구멍들은 감시탑과 같은 높은 건물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청동기시대가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2. 검단리 마을의 모습

울산 검단리 마을은 약 4,000㎡ 크기의 작은 마을로, 약 100여 채의 집자리가 발굴되었습니다. 이 집자리들은 환호가 만들어지기 이전, 환호가 존재하던 시기, 그리고 환호가 폐기된 시기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2.1 환호 이전

환호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집자리 26채 중 다수는 불에 타서 무너졌습니다. 전쟁이나 재난에 의해 파괴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유물의 부족으로 보아 가재도구를 정리한 후 의도적으로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환호를 만들기 위해 집을 철거한 과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2.2 환호 시기

환호가 존재하던 시기의 집자리는 17채로, 이전보다 규모가 커졌으며 일부 집은 환호 밖에 위치했습니다. 이는 마을 내에서 계층 분화가 발생했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환호가 마을 내부와 외부를 구분짓는 명확한 경계가 되었으며, 안쪽에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바깥쪽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3 환호 폐기 이후

환호가 폐기된 후, 마을의 규모는 더 커졌습니다. 총 37채의 집자리가 발굴되었으며, 집자리의 크기와 위치에 따른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이 시기의 유물로는 환호 이전에 사용되었던 구멍무늬 토기가 사라지고, 빗금무늬 토기가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검단리 마을의 중심부에는 광장으로 추정되는 넓은 공간이 있었고, 이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중요한 사안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마을 입구 근처에서는 망루로 사용된 기둥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마을의 지도자들이 묻힌 고인돌과 돌널무덤도 확인되었습니다.

 

울산 검단리 유적

3. 환호에 둘러싸인 마을

검단리 유적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마을을 둘러싼 환호입니다. 이 환호는 길이 약 300m, 폭 2m, 깊이 1.5m 정도로, 현재로서는 사람이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크기이지만, 당시에는 더 깊고 넓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환호는 마을을 타원형으로 감싸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출입구가 있었습니다.

환호는 단순히 마을을 적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방어시설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마을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짓는 상징적 경계로도 기능했습니다. 환호는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공동체와 외부 세계를 명확하게 구분지었습니다. 이는 당시 마을들이 서로 경쟁하거나 긴장 상태에 있었음을 나타내며, 환호는 그러한 불안감과 방어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환호는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진주 대평 유적에서는 2~3중으로 환호가 만들어져 있었고, 보령 명천동 유적에서는 환호 내부에서 중국 청동거울을 소유한 제사장의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환호가 단순한 방어 기능 외에도 성스러운 장소와 속세를 구분짓는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4. 검단리 유적의 세계적 의미

검단리 유적은 한반도에서 최초로 환호로 둘러싸인 마을이 발굴된 사례로, 이후 많은 유적 발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춘천 중도, 진주 대평, 화성 쌍송리, 김포 양촌리 등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환호 마을이 발굴되었습니다.

환호 마을은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발견됩니다. 중국의 서안 반파와 강채 유적, 일본의 이타즈케 유적 등에서도 환호로 둘러싸인 마을이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환호 마을은 한반도 남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학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환호가 등장했으며, 스톤헨지와 같은 의례 공간도 환호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5. 결론

울산 검단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한반도에서의 사회적 변화와 마을 간의 긴장 상태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환호로 둘러싸인 마을은 단순히 방어적 의미를 넘어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 그리고 신성한 공간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검단리 유적을 통해 우리는 청동기시대의 복잡한 사회적, 문화적 풍경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유적 발굴은 앞으로도 많은 연구와 발견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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