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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백제의 전성기를 이룩한 정복 군주

1. 개요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년~375년)은 백제 제13대 왕으로,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입니다. 그는 백제의 영토를 남북으로 크게 확장하며 정복 군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남쪽으로는 마한을 완전히 통합하고 가야 지역까지 진출했으며, 북쪽으로는 평양성 공격을 통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습니다. 바다 건너 요서 지역과 왜국과도 활발히 교류하며, 백제의 정치적·군사적 위상을 동아시아에 각인시켰습니다.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년~375년)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년~375년)

 

2. 근초고왕의 가계와 왕위 계승

근초고왕의 본명은 『진서(晉書)』에 ‘여구(餘句)’로 기록되어 있으며, 제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입니다. 왕비는 진씨(眞氏)이고, 아들은 근구수왕(近仇首王)으로, 근초고왕의 왕위 계승 이후 그의 직계가 백제 왕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근초고왕 이후로는 왕권이 더욱 안정되었습니다.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 왕위 계승은 ‘초고계(肖古系)’와 ‘고이계(古爾系)’가 번갈아 왕위를 이었던 점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근초고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초고계가 왕위를 독점하면서 정통성 강화와 더불어 왕권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이러한 계승 안정은 백제의 대외 정복 정책을 추진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3. 근초고왕의 내치(內治)

근초고왕은 즉위 후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내며 자신과 초고계 왕실의 정통성을 공고히 했습니다. 또한 왕비 진씨 가문의 인맥을 활용해 정치적 기반을 강화했으며, 왕후의 친척인 진정을 조정좌평(형벌 담당)에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 작업을 본격화했습니다.

그는 통치 초기부터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며 왕 중심의 정치를 펼쳤고, 이 과정에서 기록된 진정의 행적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숙청 작업의 일환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특히 근초고왕 시기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라는 백제의 역사책을 편찬한 것은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문화적 작업이었습니다. 유교적 이념을 활용해 왕권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4. 근초고왕의 정복 활동

근초고왕은 남쪽과 북쪽으로의 영토 확장에 주력했습니다. 그는 남쪽 마한 지역을 정복하여 통합을 완료하고, 가야 지역으로도 진출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마한 정복의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일본서기』에 근초고왕의 가야 정복이 등장하는 점에서 그의 정복 활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초고왕의 정복 활동
근초고왕의 정복 활동

369년(근초고왕 24년),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가야의 7국을 정복하고, 전남 해안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이후 근초고왕은 남쪽의 안정을 바탕으로 고구려와의 충돌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371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를 공격하자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함께 고구려군을 격퇴했습니다. 이듬해에는 평양성까지 진출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그 결과 백제는 대방군과 낙랑군의 일부를 장악하게 됩니다.

또한, 백제는 이 시기에 요서 지역으로도 진출했다는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이 제기됩니다. 남조(南朝)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이 기록은 백제가 고구려와의 긴장 속에서 중국과의 교역 거점을 확보한 증거로 해석됩니다.

 

5. 근초고왕대의 외교

근초고왕은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동진(東晉)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372년, 백제가 동진에 사신을 보내자 동진은 근초고왕을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 領樂浪太守)’로 책봉했습니다. 이는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근초고왕은 왜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왜국에 칠지도(七支刀)를 하사했는데, 이 칼은 현재 일본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칠지도의 명문은 백제 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당시 백제의 국제적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칠지도(七支刀)
칠지도(七支刀)

근초고왕은 문물 교류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왜에 파견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주었으며, 이들은 일본 유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교류는 백제와 왜국의 군사적 협력뿐만 아니라 정치·문화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 데 기여했습니다.

 

6. 결론

근초고왕은 백제의 정복 군주로서 남쪽으로는 마한과 가야를, 북쪽으로는 평양성까지 진출하며 백제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그는 왕권 강화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왜국과의 외교를 확립하여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근초고왕의 정복과 외교 활동은 단순한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고,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동아시아에 각인시킨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됩니다.

백제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3호분. 고구려식 적석총(돌을 쌓아 만든 무덤) 형태
백제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3호분. 고구려식 적석총(돌을 쌓아 만든 무덤) 형태

근초고왕의 업적은 이후 백제의 후대 왕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이는 삼국시대의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백제가 국제적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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