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고대 금관가야(본래 가락국)의 왕묘역이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입니다. 낙동강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내륙과의 교류는 물론 해상 교역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 지역은 2세기부터 본격적인 묘역이 형성되었고, 3세기 후반에 대성동 집단이 통합 세력을 구축해 5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갈등 속에서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대성동 고분군은 다양한 무덤 형태와 유물들이 출토된 점에서 학술적으로 큰 가치가 있습니다. 목관묘와 목곽묘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서역의 유물까지 발견되며 당시의 국제 교류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곳은 사적 제341호로 지정되었으며, 인근에 대성동고분박물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2. 금관가야의 세력 이동과 대성동 고분군의 발전
2.1 고분군의 구조와 확장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1990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학술조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적지는 구릉을 중심으로 북쪽 주차장 부지부터 ‘가야의 숲’ 구간까지 포함되며, 구릉의 정상부와 사면부에 걸쳐 다양한 크기의 무덤이 조성되었습니다. 대형 목곽묘는 구릉의 높은 능선부에, 중소형 무덤은 사면과 평지에 분포합니다. 이 무덤들은 금관가야의 사회 변동을 반영하며 권력 계층의 이동과 변화를 보여줍니다.
대성동 집단은 정치적 중심지를 양동리 고분군에서 대성동으로 옮겨 왕묘역을 형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금관가야는 철 생산지로서의 역할과 철제품의 교역을 통해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대성동 집단의 위치적 이점과 철 무역의 통제는 국제적 교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2.2 대형 목곽묘와 왕묘의 출현
3세기 후반, 대성동 고분군에서 초대 왕묘로 여겨지는 29호분이 등장합니다. 이 무덤에서는 금동관, 청동솥, 철제 무기, 토기 등 다양한 부장품과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왕의 무덤을 조성하고 왕권을 상징하는 의례를 치렀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13호분에서는 주곽(主槨)과 부곽(副槨)을 나누어 다량의 부장품을 넣는 방식이 확인됩니다. 이 구조는 경주와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도 확인되는 형태로, 금관가야의 고유한 매장법과 타 지역의 영향을 모두 반영합니다.
3. 순장과 부장품: 사회적 위계와 의례
3.1 순장의 의미와 사례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대형 목곽묘에서 발견된 순장은 당대의 절대 권력을 상징합니다. 순장은 피장자와 함께 부장되어 생전의 권력과 부를 저승에서도 이어가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88호·91호분에서는 충전토(무덤 구덩이와 목곽 사이를 메우는 흙)에서도 순장 인골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88호분에서는 머리에 화살촉이 박힌 노년 여성 순장의 인골이 발견되었고,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여성 순장자들도 빗 모양 장신구와 철제 도구와 함께 부장되었습니다. 이는 순장이 단순히 왕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3.2 부장품의 국제적 교류 흔적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다양한 외래 유물들이 발견됩니다. 91호분에서는 중국의 청동그릇과 북방계 마구, 일본의 원통 모양 동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서역의 로만글라스 조각은 금관가야가 중국과 서역까지 연결된 네트워크의 일부였음을 보여줍니다. 88호분에서는 일본에서보다 더 많은 바람개비 모양 동기가 발견되며, 금관가야가 일본과의 교류를 철저히 통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봉황토성과 금관가야의 왕성
봉황토성은 대성동 고분군과 함께 금관가야의 왕성(王城) 역할을 했습니다. 이곳은 임호산과 경운산에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하며, 주거지와 공방, 철기 생산 시설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해반천과 연결된 접안 시설과 창고는 금관가야가 해상 교역을 적극 활용했음을 보여줍니다.
봉황토성에서는 옹관묘, 중국 화폐인 화천(貨泉), 그리고 말과 사람을 형상화한 토우(土偶)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는 봉황토성이 단순한 생활 공간을 넘어 제의와 의례가 이루어지던 장소였음을 시사합니다.
5. 철 생산과 국제 교역의 허브
가야의 철은 당시 동북아시아 교역에서 중요한 화폐와도 같았습니다.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다량의 **철정(鐵鋌)**과 철제 무기, 농공구, 말갖춤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갑옷과 투구, 말 갑옷 등의 다양한 철제 유물들은 가야의 철기 기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91호분에서는 중국의 도교적 상징인 운모(雲母) 장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가야가 중국과 교류하며 도교적 신앙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6. 금관가야의 쇠퇴와 대성동 고분군의 변화
5세기 이후 대성동 집단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532년에는 결국 신라에 복속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왕묘급 무덤인 73호분에서도 갑옷과 금동제 화살통 등이 확인되었으며, 창녕과 고성 지역과의 교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금관가야가 마지막까지도 지역 간 네트워크를 유지했음을 보여줍니다.
7. 결론: 동북아시아 교류의 중심지, 김해 대성동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금관가야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이자 국제 교역의 허브였습니다. 철을 기반으로 한 경제력과 중국, 일본, 서역과의 교류를 통해 금관가야는 한때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이곳은 대성동고분박물관과 함께 잘 보존되어, 가야의 찬란한 역사를 조명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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