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nglish Japanese

몽촌토성[夢村土城]: 한성백제시대 또 하나의 왕성

서울 몽촌토성
서울 몽촌토성

 

개요

몽촌토성(사적 제297호)은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하며 현재는 올림픽공원으로 정비·복원된 유적지입니다. 북쪽으로는 풍납토성이 약 700m 떨어져 있고, 서남쪽에는 방이동 고분군과 석촌동 고분군이 인접해 있어 한성백제 시대의 주요 유적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입니다.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이용해 축조된 성으로, 한강변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리토성(二里土城)’이라 불렸던 이 성은 1975년 웅진 천도 1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백제 시대 생활 거점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발굴과 복원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몽촌토성이 백제 초기의 왕성으로 기능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몽촌토성[夢村土城]

 

남한산 구릉을 활용한 토성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 뻗어 나온 구릉(표고 44.8m)을 따라 쌓은 토성입니다. 성의 형태는 마름모꼴이며, 남북 최대 730m, 동서 최대 570m로 성벽의 총 길이는 약 2,285m에 이릅니다. 성벽은 점성이 높은 점토를 얇게 펴서 다지는 판축기법으로 축조되었고, 동쪽의 경사 완만한 지형은 인위적으로 급경사화했습니다.

성의 북쪽, 동북쪽 등에는 해자가 존재하며 이는 한강 지류인 성내천을 이용해 일부 구간을 파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부에는 북문, 동문, 남문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출입구들은 배수구의 기능도 겸했습니다. 마름모꼴의 각 모서리에는 망대(望臺)가 설치되었으며, 이들은 고지대에 위치해 성 주변을 넓게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한성 시기 백제 유적, 한눈에 살펴보기
한성 시기 백제 유적, 한눈에 살펴보기

 

주요 발굴 조사 성과

1. 내부 시설

발굴 조사에서는 적심 건물지와 판축대지, 연못지, 수혈주거지, 저장공 등 다양한 유구들이 확인되었습니다.

  • 적심 건물지: 고지대에 위치한 이 건물지는 공공건물 혹은 고위층의 주거지로 추정됩니다.
  • 판축대지: 이 대지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지휘소로 추정되며, 적심 건물지와 평행하게 배치되었습니다.
  • 연못지: 고지대의 인공 연못과 남문 근처의 자연 유수지 형태의 연못이 발견되었습니다.

2. 수혈주거지와 저장공

L자 형태로 파낸 수혈주거지는 군인들의 막사로 활용된 것으로 보이며, 온돌 시설과 무기류가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음식물 저장을 위한 저장공에서는 다양한 백제 토기들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몽촌토성[夢村土城] 주요 발굴 조사 성과
몽촌토성[夢村土城] 주요 발굴 조사 성과

 

백제와 중국의 교류 증거

몽촌토성에서는 다양한 백제 토기뿐만 아니라 중국 위·진 시대의 도자기와 청자, 금동제 허리띠 장식 등도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백제와 중국 남조의 교류를 입증하는 정교한 청자와 도제 벼루가 출토되어 백제가 중국 강남 지역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몽촌토성이 단순한 방어용 성이 아니라 왕이나 고위 귀족이 거주했던 장소였음을 시사합니다.

 

몽촌토성[夢村土城]
몽촌토성[夢村土城]

 

 

 

고구려 점령기의 흔적

475년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했을 때, 몽촌토성에서도 고구려군의 주둔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온돌 시설이 있는 건물지가 발굴되었으며, 고구려 양식의 토기와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551년 백제-신라 연합군에 밀려날 때까지 이곳에 주둔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굽다리접시(高杯)
굽다리접시(高杯)
세발토기(三足器)
세발토기(三足器)
계란모양토기(長卵形土器)
계란모양토기(長卵形土器)
짧은목항아리(短頸壺)
짧은목항아리(短頸壺)
원통형그릇받침(圓筒形器臺)
원통형그릇받침(圓筒形器臺)
동전무늬도기(錢文陶器) 편
동전무늬도기(錢文陶器) 편
‘궁(宮’)자명 곧은입토기(直口短頸壺) 편
‘궁(宮’)자명 곧은입토기(直口短頸壺) 편
얼굴 문양(人面文) 뚜껑
얼굴 문양(人面文) 뚜껑
금동제 허리띠장식(金銅銙帶金具)
금동제 허리띠장식(金銅銙帶金具)
뼈로 만든 비늘갑옷(骨製札甲)
뼈로 만든 비늘갑옷(骨製札甲)

 

한성의 남성(南城)이자 별궁으로서의 몽촌토성

풍납토성이 평소 왕이 거주하던 정궁이었다면, 몽촌토성은 방어성을 겸한 별궁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왕족과 귀족을 위한 독립적인 생활 공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한성 별궁에서 침류왕의 원자가 태어났다”는 구절도 이와 관련된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침류왕 : 백제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었기에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왕이다.

또한, 고지대의 건물지와 판축대지, 금동제 유물들은 왕이나 고위 귀족의 생활 공간임을 암시합니다. 풍납토성이 정치, 종교, 대외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면, 몽촌토성은 전쟁 시 도성을 방어하는 기능과 동시에 왕족의 피난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맺음말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 한성백제 시대의 중요한 유산으로서, 단순한 방어성을 넘어 왕성의 일부로 기능한 유적입니다.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의 정궁과 별궁으로 역할을 분담하며, 삼국 간의 경쟁 속에서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습니다. 오늘날 올림픽공원 내에 복원된 몽촌토성은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그 고유한 가치를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