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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대평 유적과 번개무늬 토기의 미스터리

1. 진주 대평 유적의 개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기원에 대한 질문은 오래된 고고학적 논제입니다. 진주 대평 유적은 이러한 논쟁에 깊이를 더하는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이 유적은 1967년 남강댐 건설 과정에서 발견되었으며, 이후 지속적인 발굴을 통해 한반도 남부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진주 대평 유적 전경
진주 대평 유적 전경

청동기 시대의 기원에 대한 질문

한국 청동기 문화는 자체적으로 발전한 것인지, 아니면 외부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진주 대평 유적은 이러한 질문에 답할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곳으로 평가됩니다.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졌고,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넓은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발굴로 인해 환호, 집자리, 경작지, 무덤 등 다양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청동기 시대의 사회 구조와 생활 양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었습니다.

 

2. 청동기시대의 도시, 대평 마을

대평 유적의 복합적 사회 구조

대평 유적은 단순한 주거지 이상의 복합적 사회 구조를 보여줍니다. 대규모 경작지와 무덤, 환호(마을을 둘러싼 방어 시설), 제의 장소 등 다양한 시설이 발견되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사회적 분화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특히, 집자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형성되었으며, 가지무늬토기라는 특이한 유물이 이곳에서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물은 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남해안에서만 출토되는 희귀한 유형의 토기입니다.

가지무늬토기 / 진주 대평리, 높이 23cm
가지무늬토기 / 진주 대평리, 높이 23cm

 

환호와 방어 체계

대평 유적의 환호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시설로 여겨집니다. 특히 옥방 4지구에서는 마을을 둘러싼 2중의 환호가 발견되었으며, 환호 안쪽에는 식량을 저장하기 위한 구덩이가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가 외부의 위협을 대비하면서 공동의 생활 공간을 보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돌널 무덤
돌널 무덤

경작지와 생활 공간의 분리

대평 마을에서는 주거지와 경작지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은 1지구에서는 돌널무덤이 경작지와 나란히 배치되어, 주거지와 경작지의 분리를 보여주며, 이는 생산과 주거 공간의 경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선조들에게 풍작을 기원하는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3. 900km를 넘나든 교류 흔적

진주 대평 유적의 유물과 외부 교류

대평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지만, 외부 문화와의 연결성도 시사합니다. 특히 붉은색 칠이 된 목이 긴 항아리, 겹아가리 토기 등은 중국 동북 지역, 특히 태자하 유역의 마성자 문화와 유사한 점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두 지역 간의 직선 거리는 900km에 달하며, 그 사이를 이어줄 유적이나 문화적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겹아가리 단지
겹아가리 단지
붉은간토기 / 진주 대평리, 높이 8.1cm
붉은간토기 / 진주 대평리, 높이 8.1cm
붉은간토기 / 김해 무계리, 높이 11.3cm
붉은간토기 / 김해 무계리, 높이 11.3cm

 

바닷길을 통한 교류 가능성

양 지역 간의 교류가 있었다면, 바닷길을 통해 단번에 이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장거리 교류는 단지 대평 유적만의 사례는 아닙니다. 진주 남강 유역에서 발견된 번개무늬 토기 역시 압록강 유역의 용천 신암리 유적과 유사한데, 두 지역 역시 600km 이상 떨어져 있으며, 중간 지역에서 이러한 문화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번개무늬 토기
번개무늬 토기

농업 방식의 차이

대평 유적에서는 논 대신 밭이 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기후와 작물의 특성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벼를 재배했지만, 중국 동북 지역에서는 옥수수와 같은 밭작물을 주로 경작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양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교류하면서도 서로 다른 농업 방식을 유지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4. 갑자기 사라진 대평 사람들

청동기 시대의 종말과 대평 사람들의 실종

청동기 시대 내내 번성했던 대평 마을은 청동기 시대의 종말과 함께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대평 유적에서는 다음 시기의 토기인 덧띠문토기문화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이 지역 사람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 이주설과 야요이 문화

대평 사람들의 행방에 대해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는 일본으로의 이주설입니다. 이는 한반도 남부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새로운 철기 문화를 가진 덧띠토기문화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일본으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꽃피웠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일본 야요이 문화는 벼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대평 유적의 문화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이주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부족해 여전히 신중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야요이 문화
야요이 문화

대평 마을의 마지막 모습

대평 마을이 청동기 시대의 끝자락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남강 유역의 덧띠토기문화는 이전 대평 유적의 사회적 복잡성과 비교했을 때 퇴보한 양상을 보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대평 사람들이 겪었던 격변의 흔적일 수도 있으며, 그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과제입니다.

 

5. 결론

진주 대평 유적은 한반도 남부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특히 대평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외부 문화와의 교류 가능성을 시사하며, 한반도 청동기시대 문화의 기원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대평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실종과 장거리 교류의 정확한 원인 등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이러한 질문들이 풀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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