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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 백제의 마지막 왕도를 지키다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소산성의 개요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백제 사비 시대(538~660)의 궁궐 배후에 위치한 중요한 산성으로, 사적 제5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입니다. 백제 시대에는 사비성(泗沘城) 또는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불렸으며, 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시가지 북쪽에 있는 부소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성왕(聖王)이 부여로 천도하며 사용한 백제의 왕성이자, 외적의 침공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기능했습니다. 현재 부소산성은 부소산 남쪽에 위치한 관북리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중요한 유적지로 남아 있습니다.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백제의 사비 천도와 부소산성의 역할

1. 웅진에서 사비로의 천도

백제는 원래 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두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받아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웅진은 방어에 유리한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수도로서의 기능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에 백제는 남조(南朝)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를 발전시키고 국력을 회복하며 새로운 도성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성왕은 538년에 도읍을 사비(泗沘, 현재의 부여)로 옮기며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었고, 이때부터 백제의 마지막 123년간 사비가 왕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2. 부소산성의 배치와 구조

사비 천도는 웅진으로의 급작스러운 이동과 달리,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 특징입니다. 도성은 자연 지형을 활용해 북쪽과 동쪽에는 나성(羅城)을 두르고, 남쪽과 서쪽은 백마강을 경계로 삼아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특히 부소산성은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 왕성으로,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전시에는 방어시설로 기능했습니다. 왕궁과 도성의 배치는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계획적인 구조는 발굴된 유적에서도 확인됩니다.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소산성의 왕도 수호 역할

부소산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으로 언급되며, 백제 왕도의 방어 목적으로 축조된 산성입니다. 그러나 백제 시기 부소산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피해 웅진으로 도망갔고, 남아있던 왕족과 백성들은 사비성이 포위되자 항복하게 됩니다. 이렇듯 중요한 순간에 부소산성이 충분한 방어 역할을 다하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백제 멸망 이후에도 부소산성은 부흥운동군의 거점이 되었으며, 이는 부소산성이 백제인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부소산성 내 주요 건축물

부소산성 내부에는 백제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으며, 그중 성벽과 문지(門址), 서복사지(西覆寺址), 군창지(軍倉址),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낙화암(落花巖) 등이 눈에 띕니다.

1. 성벽

부소산성의 성벽은 판축(版築) 기법으로 축조되었습니다. 이 기법은 고운 자갈과 진흙을 여러 겹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백제의 한성 시기 왕성에서도 사용된 기술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백제 시기 성벽의 길이는 약 2,495m로, 당시의 방어 체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2. 문지(門址)

남문지와 동문지가 확인되었으며, 남문지가 산성의 정문 역할을 했습니다.

3. 서복사지

서복사지는 부소산성 서남부에 위치한 사찰 유적으로,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곳에서는 금동제 허리띠와 연화문 와당 등 왕실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4. 군창지(軍倉址)

부소산성 동쪽에 위치한 군창지에서는 조선 시대의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었으며, 백제 시대부터 사용된 창고로 추정됩니다.

5. 수혈주거지

수혈주거지는 병영으로 사용된 움집터로, 내부에서 금봉황 장식과 철제 무기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부소산성이 군사적 기능도 수행했음을 보여줍니다.

6. 낙화암

백마강 절벽에 위치한 낙화암은 삼천궁녀가 몸을 던진 전설로 유명합니다. 이 전설은 후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붙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백제 멸망 이후의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백제 멸망 이후에도 통일신라와 조선 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산성 인근에는 백제의 충신들을 기리는 삼충사(三忠祠)와 궁녀들을 추모하는 고란사(皐蘭寺) 등 다양한 사당과 사찰이 세워졌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부여현의 관청인 동헌과 부여객사가 부소산 초입에 건설되었고, 사비루와 반월루 등 누각이 세워져 부여의 경치를 즐기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결론

부소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왕도인 사비를 지키기 위해 축조된 중요한 산성으로, 당시 왕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방어와 후원의 기능을 함께 수행했습니다. 백제 멸망 이후에도 부소산성은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활용되며 백제의 상징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오늘날 부소산성은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관북리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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