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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威德王) – 백제 중흥을 꿈꾼 왕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개요

위덕왕(威德王)은 백제의 제2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54년부터 598년까지입니다. 그는 성왕의 죽음과 관산성 전투의 패배라는 위기 속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초기에는 왕권이 약했으나, 부왕의 유업을 계승하고 대외적으로 활발한 외교를 통해 백제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며 왕권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백제가 다시 한 번 중흥을 꿈꾸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태자 시절의 활동과 즉위 과정

위덕왕의 본명은 창(昌)으로, 창왕(昌王)이라고도 불립니다. 그의 시호인 위덕(威德)은 '위엄과 덕'을 의미합니다. 525년 성왕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동생인 혜왕(惠王)은 훗날 그 뒤를 이었습니다. 위덕왕의 자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명확히 남아 있지 않지만, 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사리함의 명문에 따르면 그는 일찍 사망한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阿佐太子)가 등장하는데, 그는 일본의 쇼토쿠태자의 스승으로 전해집니다.

 

위덕왕(威德王)
위덕왕(威德王)

 

위덕왕은 태자 시절부터 성왕을 도와 군사활동에 나섰습니다. 특히 553년 고구려를 공격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고, 관산성 전투에서도 신라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며 백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위덕왕은 이 위기 속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위덕왕 초기의 왕권 강화 노력

관산성 전투의 패배로 백제 내부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로 인해 위덕왕은 즉위 초기부터 강한 반대와 비난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부왕 성왕의 위상을 바탕으로 정국을 수습하고자 했으며, 신라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몇 차례 군사 활동을 벌였습니다. 555년에는 신하들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대신 100명의 승려를 출가시키고 공덕재를 시행하는 선에서 타협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567년에는 성왕의 유해를 안치하고 부여 능산리 일대에 능사를 건립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행사가 아닌 왕권 강화를 위한 중요한 정치적 조치였습니다. 능사의 창건을 통해 성왕의 권위를 계승하고 왕실의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백제의 왕권을 다시 한 번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덕왕 시대의 대외관계

위덕왕은 중국과 왜(일본) 등 외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 말기에서 수(隋)로의 통일이 진행되던 혼란기였으며, 위덕왕은 남조와 북조를 넘나들며 외교적 활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570년부터는 북제와 조공 관계를 맺으며 외교를 다변화하였고, 577년에는 남조의 진(陳)북주(北周)에 사신을 보내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와의 관계도 긴밀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위덕왕은 불경과 불상, 승려와 기술자를 왜에 파견하면서 양국 간의 문화 교류를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신라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는 동시에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598년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려 할 때, 위덕왕은 군사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자청하며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부여 능산리사지와 능사(陵寺) 건립

위덕왕은 부왕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여 능산리 왕릉 묘역에 능사를 건설했습니다. 능사는 백제의 전형적인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구조로,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또한 회랑과 공방, 도로, 수로 등의 다양한 부속 시설도 발견되었습니다.

1993년의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백제의 뛰어난 공예 기술과 종교적 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이 향로는 봉황 장식과 봉래산의 조각이 특징적이며,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1995년의 조사에서는 목탑지에서 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昌王銘 石造舍利龕)이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능사가 567년에 왕실의 주도로 건립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결론

위덕왕은 백제의 위기 속에서 즉위하여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성왕의 유업을 계승하고 능사 건립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다지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왜 등 여러 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백제가 다시 한 번 중흥을 꿈꾸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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