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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蓋鹵王): 한성의 함락과 백제의 변천

1. 개로왕의 생애와 역사적 배경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은 백제 제21대 왕으로, 한성백제 시대를 마감한 인물입니다. 그의 치세는 백제의 체제 정비와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대한 방어가 주요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난관에 부딪히며 결국 한성(漢城)이 함락되었고, 그는 전사했습니다. 이로써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 현재의 공주)으로 옮기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풍납동 토성 복원 모형(한성백제박물관)
풍납동 토성 복원 모형(한성백제박물관)

 

2. 개로왕의 즉위와 왕권 강화 정책

개로왕의 즉위 과정

개로왕의 본명은 경사(慶司)이며, 『위서(魏書)』와 『송서(宋書)』에서는 여경(餘慶)으로도 불립니다. 그는 비유왕(毗有王)의 장남으로,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의 즉위 과정은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위계승 초반 14년간의 기록 부재와 임시 매장된 부왕의 유골을 뒤늦게 장례 지낸 점은 왕위 다툼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왕권 강화와 권력 재편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지배체제를 개편했습니다. 458년(재위 4년) 송나라에 표문을 보내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 같은 관직을 왕족들에게 부여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는 부여씨 왕족에게 군사적·정치적 권한을 집중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특히 해씨와 진씨 등 기존 귀족 세력을 배제함으로써 새로운 권력 기반을 마련하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이와 같은 군사적 재편은 북방 유목 민족의 관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왕실 중심의 정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3. 백성 통치와 민생 안정 정책

개로왕은 즉위 초반 대규모 토목공사를 자제하며 국내 정치에 집중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쟁과 노동력 동원에서 벗어난 백성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도미(都彌) 설화에서는 ‘편호소민(編戶小民)’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백제 정부가 일반 백성까지 호적에 등록하여 통제했음을 보여줍니다.

 

4. 대외 관계와 외교 전략

신라와의 나제동맹

백제와 신라는 433년에 나제동맹을 체결하며 고구려에 공동 대응했습니다. 개로왕 대에도 이 동맹은 유지되었으며, 475년 고구려가 한성을 공격했을 때 신라는 1만 명의 군사를 지원했습니다. 이는 두 나라의 군사적 협력 관계가 깊었음을 의미합니다.

왜국과의 외교

개로왕은 461년 동생 곤지(昆支)를 왜(倭)로 보내 외교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곤지를 군사적 권한을 가진 군군(軍君)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백제가 군사적 협력을 통해 왜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북위와의 외교 실패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송나라와 북위(北魏)와의 외교를 시도했습니다. 472년에는 북위에 조공을 재개하며 고구려를 견제하는 동맹을 제안했으나, 북위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백제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결과적으로 고구려가 대대적인 남하 정책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 한성 함락과 개로왕의 죽음

고구려의 첩자 도림(道琳)

고구려는 첩자 도림을 보내 개로왕을 속이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유도했습니다. 왕궁과 성곽의 수리, 한강변 둑 건설 등 과도한 공사는 백성들의 불만을 초래했고, 국고도 고갈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침공과 한성 함락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했습니다. 백제군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7일간 저항했지만 결국 북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개로왕은 남성(몽촌토성)에서 기병을 이끌고 탈출하려 했으나, 고구려 장수에게 사로잡혀 아차성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개로왕과 한성 백제 최후의 날
개로왕과 한성 백제 최후의 날

개로왕의 죽음과 한성 함락으로 백제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수도를 웅진으로 옮겨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습니다.

 

장수왕의 남쪽 진출 · 충주 고구려비전시관
장수왕의 남쪽 진출 · 충주 고구려비전시관

 

6. 도미 설화와 백제 사회의 모습

도미 설화의 의미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도미 설화는 개로왕을 폭군으로 묘사합니다. 왕은 도미의 부인을 시험하고, 그녀가 절개를 지키자 도미를 처벌하고 부인을 강제로 취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하며 절개를 지킵니다.

백제 사회의 변화와 농민층의 몰락

이 설화는 단순히 개로왕의 폭정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백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편호소민’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개로왕 대에는 농민들이 국가의 통제 하에 조세를 납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공사와 정치적 혼란은 자영농민층의 몰락을 초래했고, 도미 부부의 유랑은 이러한 사회적 불안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7. 결론: 개로왕의 죽음과 백제의 전환

개로왕은 백제의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외교적 실패와 고구려의 침공으로 인해 왕도 한성이 함락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성백제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운 시작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장수왕 시기 고구려의 영역
장수왕 시기 고구려의 영역

개로왕의 이야기는 외교 실패와 내부 혼란이 어떻게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또한 도미 설화와 같은 기록은 당시 백제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개로왕의 최후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백제 역사 속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의미하며, 이후 백제는 웅진과 사비 시대를 통해 다시 부흥을 도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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