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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과 신라의 자주적 발전

박제상 유적
박제상 유적

1. 눌지마립간의 개요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은 신라의 제19대 왕으로,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본격화하자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어 대(對) 고구려 전선을 형성하였고, 신라의 왕위 계승을 장자 중심으로 확립하여 정국을 안정시켰습니다.

그의 통치는 신라가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주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불교의 전래와 같은 문화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신라 마립간의 재위 기간
17대 내물 재위: 356~402년
18대 실성 재위: 402~417년
19대 눌지 재위: 417~458년
20대 자비 재위: 458~479년
21대 소지 재위: 479~500년

 

2. 눌지마립간의 가계와 즉위 과정

눌지마립간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아들로 성은 김(金)입니다. 어머니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 김씨이며, 왕비는 실성마립간의 딸입니다. 그의 자식들로는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지증왕(智證王)을 낳은 조생부인이 있습니다. 눌지마립간은 417년에 왕위에 올라 458년까지 41년간 통치했습니다.

즉위 과정에서 고구려의 간섭이 깊이 개입된 것이 주목됩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군사적 지원으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커졌고, 실성마립간은 고구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르며 내물마립간 계열을 견제했습니다. 그러나 실성마립간은 눌지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제거당했고, 눌지는 고구려 세력의 눈치를 보며 왕위에 올랐습니다.

 

 

3. 박제상의 활약과 왕권 강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눌지마립간은 고구려와 왜국에 인질로 잡혀 있던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귀환시키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그는 이 임무를 박제상에게 맡겼습니다.

  1. 고구려에서 복호 구출
    박제상은 418년에 고구려로 가 장수왕과 담판을 벌여 복호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박제상은 변장을 통해 고구려군의 눈을 피해 복호를 탈출시켰다고 전해집니다.
  2. 왜국에서 미사흔 구출
    이후 박제상은 왜국으로 가서 미사흔을 귀환시켰으나, 자신은 왜국에 남아 신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에 눌지마립간은 박제상을 대아찬(大阿湌)으로 추증하고 그의 가족을 예우했습니다.

이처럼 왕권 강화를 위한 인질 귀환 작전은 내물마립간 계열의 정권 안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눌지마립간은 이후 장자 상속의 원칙을 확립하여 왕위 계승 분쟁을 방지했습니다.

 

 

 

4. 나제동맹의 형성과 대(對) 고구려 외교

1) 고구려와의 긴장과 백제와의 동맹

눌지마립간은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백제와의 나제동맹을 체결합니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 정책을 본격화하자, 신라는 백제와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나제동맹은 433년(눌지마립간 17년)에 시작되었으며, 백제의 비유왕이 먼저 신라에 화친을 청하면서 성립되었습니다. 이듬해 백제는 말 두 필과 흰 매를 신라에 선물했고, 신라는 이에 금과 명주로 답례했습니다.

2) 고구려와의 마찰

450년(눌지마립간 34년)에는 고구려와의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신라 영토 내에서 사냥하다가 신라 성주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장수왕의 침공이 이어졌습니다. 신라는 이 침공을 사죄하며 위기를 모면했지만, 양국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이후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신라는 나제동맹에 따라 백제를 지원했습니다.

나제동맹은 신라가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 불교의 전래와 민간 신앙

눌지마립간의 치세 동안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에 들어오며 불교가 민간에 전파되었습니다. 묵호자는 신라의 모례라는 인물의 집에 머물렀으며, 왕의 딸의 병을 치료하면서 불교의 영향력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불교가 왕실에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으나, 당시 신라의 토착 신앙과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불교가 공인되지는 못했습니다. 불교 공인은 훗날 법흥왕 시기인 528년에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6. 눌지마립간의 정치적 유산과 마립간 호칭의 의미

1) 마립간 호칭의 변화

삼국사기에는 눌지마립간은 ‘마립간’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첫 왕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이전의 왕호인 이사금(尼師今)이 ‘연장자’를 의미했던 것과 달리, 마립간은 최고 지배자를 뜻하며 왕의 정치적 권위가 강화된 것을 보여줍니다.

2) 장자 상속 원칙의 확립

눌지마립간은 장자 중심의 왕위 계승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이는 왕위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고 정권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였습니다. 이후 자비마립간소지마립간이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7. 결론: 자주적 발전을 이룬 왕, 눌지마립간

눌지마립간의 통치는 신라가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발전을 도모한 시기였습니다. 왕위 계승의 안정화, 백제와의 나제동맹 체결, 박제상의 활약을 통한 왕권 강화는 모두 그의 주요 업적입니다. 또한 불교의 민간 전래는 신라의 문화적 발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눌지마립간의 노력으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인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정치적 유산은 이후 신라의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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