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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천도: 나라의 중심을 옮기다

평양 보통문(6세기 중엽 초축, 1473년 개축)
평양 보통문(6세기 중엽 초축, 1473년 개축)

고구려는 국력과 왕권을 강화하며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천도(遷都)는 단순한 도시 이동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적 행위로, 고구려가 전략적, 경제적, 정치적 필요에 따라 도성을 이전한 사례는 국가 발전과 외교 정책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고구려의 천도를 중심으로 그 배경과 의미를 심도 있게 다루어 보겠다.

 

1. 졸본: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고구려 건국과 졸본 지역

고구려는 건국 초기, 지금의 중국 요녕성 환인(桓仁) 지역에 위치한 졸본(卒本)을 첫 번째 도성으로 삼았다. 문헌에 따르면 이곳은 혼강(渾江)의 지류인 비류수(沸流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혼강 서쪽에 위치한 평지성인 하고성자성과, 동쪽의 천혜의 요새 오녀산성이 그 중심이었다.

고구려의 성

고구려의 초기 도성 구조는 평시성방어용 산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평시성은 평상시 거주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산성으로 대피했다. 이는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방어 전략의 일환이었다.

 

2. 국내성으로의 천도

유리왕의 천도와 국내성 선택

고구려는 건국 초기의 졸본에서 벗어나 2세기 초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琉璃王)이 돼지를 찾던 중 국내 지역의 산세와 물산이 풍부함을 발견하고 천도를 결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천도의 정확한 시기가 산상왕(山上王) 때일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졸본성(오녀산성)
졸본성(오녀산성)

국내성은 현재 중국 집안(集安) 지역에 위치하며, 고구려의 평시성과 방어성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평상시에는 압록강과 통구하가 만나는 지점의 평지성에서 생활했고, 외부 침략 시에는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대피해 방어를 했다. 이와 같은 도성 운영 방식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방어 체계로 자리 잡았다.

 

3. 평양으로의 천도: 427년, 장수왕의 결단

427년(장수왕 15년), 고구려는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을 떠나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평양은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 터가 있던 역사적 중심지였으며, 지리적 조건이 탁월했다.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되었던 평양은 이미 경제력과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평양 천도의 배경

평양 천도의 배경

고구려의 천도는 단순히 남진 정책의 일환이 아니었다. 국내성은 지형이 협소해 급성장한 고구려의 중심지로 한계가 있었다. 반면 평양은 넓은 평야와 식량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어 새로운 수도로 적합했다. 또한 교통이 발달한 평양은 남쪽의 백제와 신라, 북방 세력과의 외교와 군사적 교류에도 유리했다.

천도 직전에도 고구려는 평양 지역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광개토대왕은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세우는 등 지역 관리에 힘썼고, 고국원왕은 백제와의 전투에서 평양에서 전사했다.

 

4. 장안성으로의 이도: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552년(양원왕 8년), 고구려는 평양 내에서 장안성(長安城)을 새롭게 축조하고 586년(평원왕 28년)에 이도(移都)했다. 장안성은 평양성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지역에 위치하며, 도성의 확장과 더불어 새로운 군사적 방어 거점이 되었다.

장안성으로의 이도

장안성의 군사적 중요성

이 시기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남쪽의 신라·백제 연합군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장안성 축조는 이러한 대내외적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방어 체계의 일환이었다. 장안성은 기존의 고구려 도성과는 달리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형태로 설계되었다.

내성, 중성, 외성, 북성의 네 구역으로 나뉜 장안성은 일반 백성의 거주 구역까지 방어 체계에 포함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중국 북위(北魏)와 수나라(隋)의 도시 설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의 도성 운영이 더욱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5. 천도의 정치적·군사적 의의

고구려의 천도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닌, 국가의 전략적 필요와 정치적 변화가 반영된 결과였다. 특히 평양 천도는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장수왕 시기에는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어, 왕권 집중의 일환으로 천도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천도는 또한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동북아시아 패권 경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평양으로의 천도 이후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한강 유역을 두고 벌어진 전쟁은 삼국 간의 세력 균형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였다.

 

6. 고구려 천도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고구려의 천도는 단순한 도성의 이동을 넘어, 각 시대의 정치·경제·군사적 필요에 따라 국정 운영 방식을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졸본에서 국내성, 그리고 평양과 장안성으로 이어지는 수도의 변천은 고구려의 성장과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안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로, 국력이 약화된 상황에서도 고구려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규모 도시 건설의 성과였다. 하지만 장안성이 함락되며 고구려의 긴 역사는 마무리되었고, 이 천도와 도성 운영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7. 결론

고구려의 천도는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과 발전을 좌우한 중요한 선택이었다. 전략적 요충지를 중심으로 한 천도는 왕권 강화, 귀족 세력 통제, 군사적 방어 체계 강화 등 다양한 목적을 달성하며 고구려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의 천도는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장면을 구성하며, 그 유산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학문적 연구와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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