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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명재상 을파소: 나라를 안정시킨 국상

1. 을파소 개요

을파소(乙巴素)는 고구려의 국정 전반을 안정시킨 인물로, 고국천왕(179~197년 재위)산상왕(197~227년 재위) 두 왕을 보좌하며 국상(國相)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5부 중심의 고구려 권력 구조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통제력을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입니다. 또한, 고구려 역사상 중요한 빈민 구제 제도진대법(賑貸法)을 시행하는 등 민생 안정에도 공헌했습니다.

삼국사기 을파소 기사
삼국사기 을파소 기사

2. 고국천왕 시대의 고구려 정치 상황

2.1 왕권 강화와 중국 세력의 위협

고국천왕은 고구려가 외부의 위협에 맞서며 왕권을 강화할 기반을 다지려 했던 군주입니다. 재위 중 중국 후한(後漢)과의 대립이 이어졌으며, 왕은 군사적 지휘를 직접 맡아 외침을 막아냈습니다. 특히 184년, 요동태수의 침공을 물리친 사건은 고국천왕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2 5부의 갈등과 반란

당시 고구려는 왕족 계루부(桂婁部)와 다른 4부(部) 간의 미묘한 권력 다툼 속에서 왕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고국천왕 12년(190년), 왕후의 친척인 좌가려(左可慮)어비류(於畀留)가 반란을 일으키며 이러한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었습니다. 연나부(椽那部)까지 가담한 이 반란은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지만, 고국천왕이 직접 진압하며 간신히 평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란의 여파로 나라가 크게 혼란에 빠지자, 고국천왕은 난국을 해결할 인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3. 을파소, 국상에 오르다

3.1 안류의 추천과 을파소의 등용

고국천왕은 각 부에 인재를 천거하도록 명령하였고, 동부(東部)의 안류(晏留)가 추천받았습니다. 그러나 안류는 자신의 능력을 겸손히 사양하며,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을파소를 추천했습니다. 을파소는 유리명왕 시대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으로, 지혜롭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고 소개되었습니다.

제가회의(諸加會議)의 의장 국상(國相) 을파소
제가회의(諸加會議)의 의장 국상(國相) 을파소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조정으로 초빙했으나, 을파소는 하사된 관직을 사양하며 자신이 나라를 바로잡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고국천왕은 그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해 국정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겼습니다. 이는 왕실이 5부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3.2 국상(國相)의 역할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국상이 제가회의(諸加會議)의 의장 역할을 하며, 왕 아래에서 최고위 지배층을 대표한 것으로 봅니다. 제가회의는 각 부의 대가(大加)들이 참여해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는 회의체였습니다. 을파소는 이 회의의 의장으로, 고구려의 정치 질서와 민생 전반을 관장하며 왕을 보좌하게 되었습니다.

 

4.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 운영

4.1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왕의 지지

을파소는 고구려 지배층의 기득권을 약화시키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했으나, 기존 5부 출신 귀족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전적으로 신임하며, “국상에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하겠다.”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왕의 지지는 을파소가 정치적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국정을 수행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4.2 공정한 상벌과 민생 안정

을파소는 신분과 계층에 구애받지 않는 공정한 상벌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인민들이 왕권을 신뢰하게 되었고, 나라 안팎이 안정되었습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성과에 만족하며 그를 추천한 안류에게도 대사자(大使者)라는 고위 관직을 내렸습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이를 두고 유비와 제갈공명의 관계에 비유하며, 고국천왕의 인재 등용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5. 고구려의 빈민 구제 제도: 진대법(賑貸法)

을파소와 고국천왕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도 힘썼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흉년과 자연재해로 많은 백성이 굶주리고 있었고, 이에 조정은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했습니다.

특히 고국천왕은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하는 백성의 사연을 듣고 감명받아, 각 관청에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찾아 구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관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겨울에 갚게 하는 제도를 마련했는데, 이 제도가 바로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입니다. 진대법은 이후 삼국과 고려의 빈민 구제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6. 산상왕 시대의 을파소와 그의 최후

197년 고국천왕이 사망한 후, 산상왕이 즉위하면서도 을파소는 국상의 직책을 이어받아 국정을 책임졌습니다. 그는 두 왕을 섬기며 정치와 민생을 안정시키는 핵심 인물로 활약했습니다.

203년(산상왕 7년) 을파소가 세상을 떠나자, 고구려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애도했습니다. 을파소는 왕권 강화와 국가 안정의 토대를 마련한 명재상으로 기억되었으며, 그의 치적은 이후 고구려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7. 결론: 고국천왕과 을파소의 교훈

고국천왕과 을파소의 관계는 명군과 명재상의 이상적인 조화를 보여줍니다. 고국천왕은 인재를 등용한 후 신뢰를 바탕으로 끝까지 지지했으며, 을파소는 왕의 신임에 부응해 공정하고 현명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이들의 노력은 혼란스러웠던 고구려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진대법과 같은 정책은 고구려가 백성을 보살피는 데 기여하며, 왕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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