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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백제인의 항해를 비는 유적

부안 죽막동 유적
부안 죽막동 유적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의 격포리 일대에 위치한 중요한 해양 제사유적입니다. 이 유적은 백제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쳐 제사가 이루어진 장소로, 바다의 신에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며 진행된 제의적 행위와 관련이 깊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죽막동 유적의 발굴 배경과 유물, 제사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죽막동 유적의 위치와 발견

죽막동 유적은 변산반도의 최서단 절벽에 위치하며, 화산성 대지와 해식애(해안 절벽)가 어우러진 특이한 지형을 지닙니다. 북쪽으로는 당굴(용굴)이 있으며, 서쪽에는 전통적으로 수성당(水聖堂)에서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오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바다와 인접해 배의 항로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유적은 1991년 국립전주박물관의 서해안 도서지역 지표조사 중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유적 지표에 삼국시대 토기와 석제 모조품 등이 드러나면서 백제 시대의 해양 제사유적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같은 해 5월부터 약 50일간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죽막동 유적
죽막동 유적

조사 결과, 노천 제사유적의 특성상 건축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백제 토기, 금속유물, 석제 및 토제 모조품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죽막동 유적이 백제 시대부터 해양 제사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 제사에 사용된 유물과 특징

발굴된 유물들은 두 개의 토기군(中心部 토기군과 가2구 토기군)으로 구분됩니다. 중심부 토기군에서는 항아리, 그릇받침, 굽다리접시 등의 다양한 토기들이 원형을 유지한 채로 출토된 반면, 가2구 토기군은 의도적으로 파괴된 파편 상태의 유물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제사를 마친 뒤 제사용 도구를 일부러 폐기하는 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토제 말(토제마)
토제 말(토제마)

주요 유물 중 하나는 토제 말(토제마)로, 머리와 사지가 절단된 채 출토되었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전통에서 재앙을 막고자 특정 형태의 모형을 깨뜨리는 풍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쇠투겁창(철모), 철검, 동방울 등 금속유물도 다수 발견되었으며, 이는 제사가 단순히 종교적 의미뿐 아니라 군사적 의도도 포함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석제 모조품으로는 유공원판(구멍이 뚫린 둥근 판), 검형 석제품, 곡옥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들은 신에게 바치는 공헌물로, 신목(神木)에 걸거나 신성한 나무에 매달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중국 육조 시대(317~581년) 청자와 고려·조선 시대의 기와편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죽막동 유적이 오랜 기간 제사 유적으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죽막동 제사의 성격과 의의

죽막동 유적항해신, 어업신, 선신(船神) 등 바다와 관련된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장소였습니다. 위치적으로도 변산반도의 돌출된 절벽에 자리 잡아, 항로를 통과하는 배들이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이정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의 제사는 크게 4세기부터 7세기까지의 백제 시대에 집중되었으며, 제사 의식에 사용된 토기와 모조품의 연대는 주로 5~6세기에 해당합니다. 특히 육조 청자가 출토된 점에서 죽막동 유적이 중국과의 무역 및 교류의 중심지 역할도 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유적의 위치는 금강 하구와 가까워 당시 항해자들에게 공주와 부여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항해자들은 죽막동에서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4. 죽막동 유적의 역사적 의미

죽막동 유적은 단순한 종교적 장소를 넘어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려·조선 시대에 격포 지역에 진(鎭)이 설치되었던 것처럼, 이곳은 서남해안의 중요한 교통과 방어 거점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사에 사용된 마구와 무기류는 단순한 해양 제사가 아닌 지역 방어와 항해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백제의 중앙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죽막동 제사는 근초고왕 시기의 백제 영토 확장과 맞물려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7세기 후반 백제가 멸망하면서 제사 행위도 급격히 중단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이는 당시 정세와 정치적 변동이 제사 의식의 중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5. 현대까지 이어지는 죽막동의 제사 전통

죽막동 유적에서 행해진 제사는 시간이 흐르면서도 지역 주민들의 민속 신앙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수성당(水聖堂)에서 제사가 이어졌고, 19세기 이후에도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평화와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는 전통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죽막동 제사가 단순한 고대 의식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6. 결론: 죽막동 유적의 고고학적 가치와 연구 전망

부안 죽막동 유적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해양 제사유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유적의 발견을 계기로 고대 해양 제사와 민속 신앙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한국의 고대사와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 연구에 새로운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오키노시마 유적과 유사한 유물들이 출토된 점은 당시 백제와 일본, 중국 간의 교류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앞으로도 죽막동 유적과 같은 해양 제사유적에 대한 연구가 확대되며, 한국 고대의 해상 활동과 문화 교류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죽막동 유적은 바다와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적 장소입니다. 백제인들의 기원과 신앙을 담고 있는 이 유적은 오늘날에도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적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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